교사로 보낸 한평생
기적의 심폐소생술: 완성형 문항을 서술형 문항으로 바꾸는 기적
고등학교에서 평가는 중요하다. 매우. 대학 입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의 평가는 지필 평가와 수행 평가로 나뉘고, 지필 평가는 선택형 문항과 서답형 문항을 적절히 안배하여 출제하는 게 일반적이다. 선택형 문항에는 진위형, 연결형, 선다형 등의 종류가 있고 서답형 문항에는 서술형, 논술형, 단답형, 완성형 등의 종류가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대개 서술형 문항이다. 서술형 문항이란 쉽게 말해, 무엇인가에 대해 쓰는(서술) 것이다. 그런데 교사들 중에는 서술형 문항과 단답형 또는 완성형 문항을 혼동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아니, 어쩌면 차이를 알면서도 채점의 편의성을 위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대해 쓴다는 사실은 같지만, 단순히 외워서 쓰는 것은 서술형 문항이 아니라 단답형 또는 완성형 문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교사들이 굉장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성적 감사에서도 서술형 문항이라고 해 놓고 단답형 또는 완성형 문항을 출제하는 경우는 언제나 지적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단답형이나 완성형 문항에 숨을 불어 넣어 서술형 문항으로 탈바꿈시키는 경우가 가끔 일어난다.
2~3년쯤 된 일이다. 중간고사인지 기말고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회 과목 시험 감독이었다. 시험지를 나누어 주고, 습관대로 서술형 문항을 살펴보았다. 나도 모르게 ‘쓰읍~’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너무도 명백한, 분명한, 뚜렷한 완성형 문항이 떡하니 서술형 문항이라는 옷을 입고 출제되어 있었다. 문항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서술형 1] 다음 보기의 네모 칸에 알맞은 말을 넣어 그의 통치 행위의 특성에 관해 서술하시오.
<보기>
…… □□□ 정책, □□□□ 정책, □□ 정책 등을 통해 우리나라는 후진적인 모습에서 점차 탈피하여 선진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네모 안에 들어갈 3음절, 4음절, 2음절의 적절한 말을 적으면 되는 문항이었다. 그렇다면 서술형 문항이 아니라 완성형 문항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완성형 문항을 서술형 문항이라고 출제하다니……. 깜짝 놀랐다. 일반적이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서술형 문항스럽게 보이려고 출제한다. 예를 들어, ‘수필의 특성 다섯 가지를 서술하시오.’와 같이. 이런 문항이 서술형이 아닌 이유는 단순 암기를 통해 답안을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핏 보면 서술형 문항처럼 보여서, 성적 감사에서 무탈할 수 있기에 이런 식의 서술형 문항을 출제하는 경우가 꽤 많다.
위의 서술형 문항은 이런 일반적인 시류를 거의 정면으로 거스르는 문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출제자가 누구인지 추론해 보았다. 사회 교과 선생님들의 모습을 떠올린 다음, 그 선생님들의 담당 과목과 담당 학년을 연결하니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이 선생님이 출제한 게 맞다면, 분명 착각을 했거나 실수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면 너무 너무 급한 상황이 있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거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그 선생님한테 어떻게 얘기를 하지? 아니, 얘기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실례가 아닐까? 그래도 너무나 명백한 오류이니 얘기를 하는 게 맞는 거겠지. 아, 내 일도 아닌데 그냥 가만히 있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내가 추론한 그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출제한 시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다. 그 선생님이 질문을 다 받고 교실을 나가면, 쫓아 나가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그 서술형 문항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학생들에게 질문을 다 받은 그 선생님이 바로 그 서술형 문제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네모 안에 3음절, 4음절, 2음절의 적절한 말을 쓰면 되는 문항이기 때문에 서술형 문항이 아니라 완성형 문항이라는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원초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3음절, 4음절, 2음절로 쓰면 안 되는 문항이었다. 그 선생님은 단 몇 마디 말로 완성형 문항을 서술형 문항으로 심폐 소생시켰다.
“네모 안에 들어갈 말만 쓰면 안 되는 거 다 알지요. 보기 전체를 몽땅 옮겨 쓰면서 네모를 완성해야 합니다.”
몇몇 학생들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선생님의 너무나도 친절한 배려에 대한 감사와 만족의 미소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사항까지 꼼꼼하게 설명해 주는 그 착하고 선량한, 제자를 배려하는 선생님에게 보내는 신뢰의 미소였다. 마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볼 수 있는 백제의 미소와 닮은 미소였다. 이렇게, 내가 완성형 문항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문항은 서술형 문항으로 심폐 소생되어 살아났다.
성적 감사 때에, 출제 문항과 학생 답안을 비교해 가며 살펴보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다. 학생들이 작성한 답안을 서술형 문항 채점 기준에 맞게 제대로 채점했는지를 살피는 게 통상적이다. 학생들의 답안만을 보면, 이 문항은 거의 완벽한 서술형 문항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게 짧지 않은, 완전한 문장으로 답안을 작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선생님이 이런 방식으로 완성형 문항을 서술형 문항으로 심폐 소생시켰으리라고 짐작한다. 그 선생님이 좀 이상한 선생님이냐고?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남을 배려하고 수업도 열심히 하는 참 좋은 선생님이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본질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서술형 문항은 선택형 문항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학생들의 사고력을 재기 위한 문항이다. 서술형 문항의 본질이 사고력 측정에 있다는 말이다. 본질을 생각하지 않고 채점의 편의성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본질을 생각하지 않는, 이런 경우는 꽤 있다. 진로 연계 체험학습이라는 활동이 있다. 진로 연계 체험학습은 학생들의 진로가 본질이고 핵심일 텐데, 진로는 온데간데없고 체험학습만 남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진로와 상관없는 체험학습을 갔다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질은 사라지고 껍질만 덩그러니 남은 형국이다.
학교 현장에서 어떤 활동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활동을 진행하는 날이 올 수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30년 이상 교직에 몸을 담았지만, 어떤 활동의 본질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 하는 말이다.
아 참, 완성형 문항을 심폐 소생시켜 서술형 문항으로 만든 그 교사는, 그 해 교육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물론, 단지 심폐소생술 때문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