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성문화재단 NEWBOOK 프로젝트] 최종합격 했습니다.
- 등 밀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못 이기는 척
6월 12일. 사이버대학교의 마지막 기말고사의 끝무렵. 시험공부보다 더 마음을 바쁘게 했던 것은 실습이었다. 정원이를 위해 시작한 발달재활 자격실습. 보고서는 생각보다 분량이 많았다. 아이 아빠는 부산으로 1박 출장 중이었다. 홀로 아이를 돌보아야 해서, 밤새 실습일지를 써서 보내야 했다. 그래야 이틀 뒤 날인받은 서류를 받아올 수 있었다. 그 무렵 아이는 실습의 영향, 즉 엄마의 공백 탓인지 컨디션의 기복이 있었다.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운 날의 연속이었다. 이것저것 할 일도 많아 고단한 6월. 나는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던 공모전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종일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고 정원이를 재우고 난 9시 30분, 유영해 작가님에게 톡이 왔다.
유영해: 협성 원고 넣으셨나요?
정원사: 아, 저 아직 24일 치 일지가 남았어요. 그래서 포기요.
유영해: 그래도 써놓은 거 일단 넣어보셔요.
정원사: <정원, 뜻밖의 여정> 다 모아 보니 분량이 안 되는데요. 12포인트 42장. 한참 모자라요.
유영해: 그래도 사진이랑 다른 글도 더 첨부해서 넣어봐요.
정원사: 그럴까요? 음, 서류라도 붙으면 밀면 먹으러 갈게요!
그렇다. 사실 난 바람을 쐬고 싶었다. 어쩌면 밀면을 먹고 싶은 마음에 지원했다. 부산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해운대 바디, 돼지국밥, 그리고 밀면이었다. 겨우 아이를 재우고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급히 지원서를 썼다. 잘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11시 59분까지는 웹하드에 업로드 해야 접수가 끝났기에 마음만 바빴다. 아, 2시간 안에 가능할까? 여기서 정원이가 깨면 도루묵이었다. 웹하드에 로그인해서 살펴보니 100여 편이 이미 업로드되어 있었다. 목차를 급히 정하고 그 순서대로 글을 붙이고 그래도 모자라는 분량은 사진으로 채웠다. 6월 12일 밤. 그렇게 운명의 수레바퀴가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래도 붙었으니 밀면이라도 먹어보자.
7월 11일. 서류합격자를 발표했다. 문자가 왔다. 10명 안에 내가 붙었단다. 믿기지 않았다. 그 당시 '자폐를 가진 어린이의 세계'와 '느린 시계의 정원'을 합쳐서 글을 모아 다듬으면서 출판사 투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는 것을 꿈꾸었다.
브런치북 <정원, 뜻밖의 여정>을 중심으로 정원을 가꾸거나 산책하면서 썼던 글을 모아 지원했다. 공모전이나 투고를 생각해서 쓴 글이 아니었다. '나의 열정'이란 공모전 주제에 열심히 가꾸어 온 가드닝 이야기가 적합했다. 큰 기대는 없었다.
정원 이야기는 나를 위한 글이었다. 한창 연재했던 지난겨울은 아이가 밥을 10일간이나 먹지 않아 세상 고단할 때였다. 작은 생명을 돌보는 기쁨에 대해 쓰는 시간은 나의 마음을 환기해 주었다. '겨울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쓰는 동안은 행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힘든 겨울을 보내는 마음이 가감 없이 들어있는 솔직한 글이기도 했다. 목차도 없이 거짓도 없는 마음을 적은 글이었다.
7월 25일부터는 정원이는 방학이었다. 2학기부터는 특수학교로 전학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정원이와 함께 적응하는 일은 내가 옆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 온 힘을 다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전학을 결심하고 추진하면서 녹초가 되어있었다. 브런치도 휴재하고, 글쓰기 모임도 멈추고 휴식을 선언했다. 한 번 더 겪은 두 번째 실패는 무척 아팠고 고단했으며 우울했다.
'일정이 괜찮을까.'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면접을 핑계 삼아 홀로 있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목표하던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7월 22일. 나는 부산역에 있었다. 코끝에 닿은 바람에서 바다 냄새가 느껴졌다. 그날 내 면접은 오후 4시 반이었지만, 누군가의 요청으로 가장 첫 순서로 바꾸어주었다. 나 역시 늦은 시간 정원이 저녁밥이 걱정이 되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부산역에서 면접 장소를 향했다. 기대했던 밀면도 부산구경도 어려운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기차를 타고 멀리 어디론가로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15년 전, 나도 부산에 있었다.
첫 번째는 20대 후반, 프로젝트 피칭으로 영화사 사람들과 함께 갔었다. 현장을 알아야 논문을 쓸 수 있다면서 패기 있게, 영화사에서 기획과 제작회계로 3년 일했다. 두 번째는 학위논문 인터뷰로 갔었다. 2015년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를 인터뷰하면서, 부산에 있어 자주 올 거라 덧붙였다. 그때는 나도 당연히 아이를 낳고 두 돌이 지나면, 어떤 일이든 복귀할 줄 알았다. 학위 논문은 2016년 영화산업정책의 시차적 접근으로 마무리했다. 10년이 지나 기획자도 연구자도 아닌, (예비) 작가로 부산에 갈 줄은 예상치 못했다. 태어난 아이는 자폐스펙트럼 진단을 받았다. 이제 지난 시절이 전생처럼 느껴졌다.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끝으로 면접 장소에 도착했다. 한 여름의 부산 날씨는 무척 무더웠고, 오랜만에 입은 하얀 블라우스가 어색했다. 조금 이르게 도착해서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과 녹차로 가볍게 배를 채웠다. 하얀 옷에 국물이라도 튀면 낭패니까 조심스러웠다. 도서관 문을 여니, 면접자들은 제각기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리 출력해 간 원고를 보면서 무엇이라 답할지 고민하면서 예상질문에 대한 답을 끄적거렸다.
이윽고 면접시간. 대기실에 모인 작가님들은 모두 프로페셔널처럼 보였다. 그중 미용실에 간 지 1년이 넘어 잔머리가 삐죽 튀어나온 머리를 질끈 묶은 아줌마는 나 혼자지 싶었다. 구두 속의 발이 어색하게 꼼지락거렸다. 아무래도 10편 중의 5편 안에 드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햇빛에 그을린 내 손이 하얀 블라우스 위에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내 면접은 첫 번째였다. 기억나는 문답은 아래와 같았다. 시간이 지나 조금 축약될 소지는 있지만.
이 글은 브런치에서 연재된 글과 큰 차이가 없는데요, 분량대로 책으로 발전시킬 수 있나요?
네 그럼요.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10주 간의 멘토링 과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 이야기를 쓰실 수 있나요? 아이를 키우면서 원고 디벨롭이 정말 물리적으로 가능하실까요?
아이가 2학기에는 특수학교 전학 예정입니다. 등교시키고 기다리면서 근처 작업실에서 쓸 계획입니다.
본인의 장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전 영화사에서 일했기 때문에 창작 관련 협업과정에 익숙합니다.
이건 협업이 아닌데요.
아뇨, 수정하고 마감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앗, 말대답을 한 것 같다. 망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가드닝으로만 쓰면 차별점이 없지 않으냐는 것, 그 이야기에 아이의 이야기ㅡ자폐를 더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해야만 하는 주제였지만 꺼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심사위원도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괜찮냐고 물었다. 일단 면접이니 씩 웃으며 무조건 할 수 있다며 뻔뻔하게 답했다.
"이미 써둔 원고가 있습니다. 괜찮아요."
아쉬움을 담고 면접은 끝났다. 답하는 동안 한 분 한 분 눈을 마주하고 씩씩하게 인사했다. 3시도 안 된 시각에 다시 부산역으로 도착했다. 5시로 끊어둔 기차표를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기차표를 예약했다. 당면한 현실 안에서 실제로 글쓰기가 가능할지 묻는 심사위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스스로도 확신은 없었기에 떨어졌다는 강력한 예감에 더 이상 부산 구경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이제 정원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나의 자리로.
그리고 7월 25일.
난 2차 합격 5명 안에 들었다.
표지 사진은 제미나이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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