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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Dec 06. 2023

나의 산티아고_2

 오비에도에서 그라도까지

Day 1 오비에도에서 그라도까지

          (Oviedo ~ Grado, 28km - 39,620걸음)

   

 10월 21일 아침 7시 조금 쌀쌀한 기운이 맴도는 길을 나섰다. 골목은 한밤중처럼 고요하다. 깜깜한 도시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따뜻하게 비추는 일요일 아침이다. 순례자를 위한 이정표가 길 위 바닥에는 순례자를 위한 조가비 문양의 이정표가 이어져 있다. 내딛는 걸음마다 함께 뛰는 심장의 울림, 벅찬 설렘과 함께 첫날 여정이 시작되었다.

 구글맵을 켜고 오비에도 도심 밖으로 걸음을 이어 나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본격적인 표시석이 보인다. 책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표시석을 마주하니 마음이 뭉글하다. 고개만 살짝 들었을 뿐인데 드넓은 이곳의 하늘은 어느새 내 마음까지 들어와 앉아 버렸다. 눈으로 담는 모든 풍경이 새롭다. 길 위에서는 나팔꽃과 토끼풀도 정답다. 담벼락을 지날 땐 빨간 장미 꽃망울도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푸른 초원 위에 여유롭게 앉은 양들의 모습, 이게 진정한 자유지 싶다. 맑고 깨끗한 공기에 끌려 발걸음이 가볍다. 어깨에 멘 배낭의 무게를 잊을 만큼 상쾌했다. 나는 가슴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신나 있었다.

 ‘그래 즐겨, 모든 걸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나에게 건네는 혼잣말까지 덩실거렸다.

 처음 쉬어가는 카르멘 예배당 안을 들여다보니 조용하고 고요했다. 오가는 순례자들의 바람이 많았을까? 중간에 펼쳐진 상자 안 동전들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예배당 밖 벤치에서 나의 첫 외국인 친구를 만났다. “Hola” 하며 환하게 인사하는 호르케는 영화 아이언맨 주인공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너무 닮았다. 예쁜 이목구비의 로사는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스페인에서 온 두 사람은 부부다. 이들은 매년 산티아고를 걷는다고 했다. 외국인들은 모두 왜 이리도 잘생기고 이쁜 걸까? 그냥 웃고만 있는데도 자꾸만 눈길이 갔다. “See you.” 아쉬운 인사로 헤어지고 나는 다시 숲길을 따라 걸었다.

 몽실몽실한 양떼구름들 사이로 해가 나오니 등줄기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편안하고 푸근한 시골 풍경도 배꼽시계는 멈추지 못했다. 슬슬 배가 고파 올 때쯤 눈앞에 작은 바르가 나타났다. 따뜻하고 진하지만 쓴맛은 없고 원두의 고소한 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에스프레소 한잔과 크로와상으로 허기진 배를 잠시 달랬다.

 요가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걷기 호흡으로 숨을 가다듬으며 하나에 들숨 둘에 날숨을 쉬어가며 호흡을 정리하고 나만의 속도로 걸음을 이어 나갔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걷고 있는 이 시간, 머릿속엔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길이다.

 오비에도를 벗어나 차도를 건너 커다란 밤나무가 있는 숲길을 지났다. 이곳에선 밤을 안 먹나? 밤송이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발에 밟히고 눌려 하얀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통일동산에는 밤나무가 떨어지기도 전, 서로 주어가겠다고 아우성들인데, 맛이 궁금했던 차에 제이콥이 밤 하나를 까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지? 제사상에 오르고 나면 제일 인기 있는 날밤과는 완전 맛이 다르다. 수분 하나 없는 게 깨물어 씹어보니 떨떠름하니 덜 익은 감 한입 베어 문 것만 같다. 이래서 바닥에 수북하게 떨어져 있었구나!

 숲길을 가로질러 마을을 지나니 작고 소박한 산타아나 예배당이 보였다. 우리나라도 가는 곳마다 교회가 있듯 이곳에도 마을마다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마을에서 내려오 니 휴게소 느낌의 제법 큰 식당이 보였다.

 오후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난 이 길을 걸은 사람 중 배 골이 제일 크지 않았을까 싶다. 먹고 뒤돌아서면 다 소화되어 버리는 왕성한 소화력, 먹어도 먹어도 지치지 않는 식욕들을 어떻게 하면 잠재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일단 시원하게 클라라(레몬소다와 맥주를 반씩 섞은 맥주)를 한잔 원샷하고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맥주 러버인 내가 처음 맛본 클라라는 한 모금 넘기면 끊을 수 없이 쭈욱 마시고 싶은 그래야만 그 맛이 더욱 달콤하고 시원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맥주다.  우리나라의 순대와 비슷하게 생긴 내장 수프인 카요스와 바게트, 샐러드, 닭구이와 구운 감자를 나는 차례대로 깨끗하게 비워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걷기 시작한 길은 아스투리아스에서 가장 긴 날론강을 좌측에 끼고 기찻길이 보이는 정겨운 풍경 속이다. 길에서 만난 시골 마을은 집마다 꽃들로 가득했다. 담벼락에 핀 분홍 제라늄, 노란 메리골드, 붉은빛 감도는 수국까지 탐스럽게도 피었다.

 쿠비아강과 할론강이 감싸고도는 넓은 평야에서 또다시 마주한 호르케와 로사, 이 여정을 함께 하는 제이콥의 한 발치 뒤에 걸으며 사진을 몇 장 담아보는데, 부부의 종아리에 보이는 타투가 눈길을 끌었다. 호르케는 순례자의 문양을, 로사는 별 문양을 새겼다. 언젠가는 부부의 사연을 듣고 싶은데 나의 통하지 않는 영어가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혼자 생각에 웃어버렸다.

 첫날의 목적지 그라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출발을 준비하면서 숙소는 따로 예약하지 않았다. 성수기가 끝나는 시점이기도 했고 프랑스 길에 비해 많은 순례자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여유 있게 걷자는, 순례길의 동행자 제이콥의 배려이기도 했다. 호르케 부부가 추천한 라 콰빈타나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세요를 찍으며 침대를 정하고 시끌벅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콰다의 목소리가 밝고 경쾌하게 들려왔다. 작은 키지만 다부진 몸매 눈망울이 크고 코도 입도 시원스럽게 생겼다. 그 옆에는 덩치 좋은 브로맨스 스페인 조셉과 호세가 떡하니 서 있었다. 하나같이 영화 속에서 뛰쳐나온 인물처럼 이쁘고 잘생겼다. 뒤늦게 대만에서 왔다는 샤샤까지 들썩들썩 배드가 꽉 차버린 콰빈타나 알베르게는 만원이었다.


 320km를 걷는 길, 산티아고로 향하는 첫날 300km가 깨졌다. 아직 남은 거리가 더 많지만, 앞으로의 여정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꽃들로 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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