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과 친해지기
어느 날 불쑥, 젖은 솜이불처럼 무거운 감정이 온몸을 짓누를 때가 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상태, 친한 친구의 술 한잔의 유혹 조차도 도망가고 싶게 만드는, 심장 한구석의 태엽이 완전히 풀려버린 듯한 텅 빈 감각. 우리는 그것을 ‘무기력’이라 부른다. 20대의 좌절이 불같이 뜨거웠고, 30대의 피로가 뻐근한 근육통 같았다면, 40대에 찾아오는 무기력은 소리 없이 번지는 짙은 안개와 같다.
지금 나의 가슴을 짖누르고 있는 무기력은 결코 우리가 게을러서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난 십수 년간 우리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가불해서 써왔다. 밤낮이 뒤바뀌는 쳇바퀴 같은 일정을 버텨내고, 조직 내에서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갈등을 풀고 다독이며 감정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썼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하루가 끝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도, 집이라는 공간은 온전한 휴식처가 되기보다 또 다른 이름의 '미션'들이 기다리는 두 번째 출근지에 가깝다.
퇴근 후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도 시동을 끈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는 날들이 늘어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다시 써야 할 가장이라는 가면과 책임감 앞에서, 오롯이 혼자 남겨진 차 안의 그 짧고 정막한 시간이 유일한 도피처가 되기 때문이다.
어릴 적, 주말이나 밤이 되면 쓰러지듯 깊은 잠에 빠져들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때는 왜 우리와 더 놀아주지 않냐며 투정도 부렸지만, 마흔의 강을 건너는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그 깊은 수면은 태만이 아니라, 고된 노동의 독을 빼내고 다음 날을 다시 살아내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의식이었음을 말이다.
우리는 지금 모든 기력을 짜내어 전쟁터 같은 하루를 견뎌낸 방전 상태다.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기엔 오늘의 현실이 너무 무겁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엔 어깨에 짊어진 식구들의 온기가 너무도 따뜻하다. 진퇴양난의 한가운데서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 마음은 스스로 전원을 차단해 버린다. 그것이 바로 40대의 무기력이 가진 진짜 얼굴, 즉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무거운 손님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하고, 또 어떻게 떠나보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다. 무기력을 극복하겠다며 억지로 자기 계발서를 읽거나 새로운 목표를 세우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은, 바닥난 통장에서 마이너스 대출을 끌어 쓰는 것과 같다.
무기력이 찾아왔을 때는 억지로 끌어올리려 발버둥 치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그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 내가 지금 참 많이 지쳤구나. 그동안 쉬지 않고 달리느라 내 마음이 파업을 선언했구나." 이렇게 스스로의 고단함을 인정하고 다독이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거창한 여행이나 값비싼 힐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출퇴근길 차 안에서 5분간 눈을 감고 온전한 정적을 느끼는 것, 주말 아침 인적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
그 짧은 '멈춤'의 시간, 아무런 목적도 성과도 요구받지 않는 무해한 시간들이 모여 다시금 심장의 태엽을 감아줄 작은 에너지를 만든다. 무기력은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지친 나를 돌보라는 내면의 신호다.
오늘도 알 수 없는 무기력감에 아침을 여는 것이 두려웠을 형과 누나, 친구와 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느끼는 그 먹먹함은 혼자만의 유별난 증상이 아니라, 이 치열한 시대를 맨몸으로 버텨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훈장이라고. 그러니 억지로 힘내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 가끔은 주저앉아도 보고, 깊은 잠으로 도망쳐도 보며, 그렇게 서로의 굽은 등을 토닥이며 이 마흔의 고개를 함께 넘어가 보자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그 무기력함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낸 당신은 충분히 위대하다고 말이다.
"괜찮아, 뭐 어때, 마음의 여유가 다시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 내가 소주 한잔 사 줄께. 그때까지 널 진심으로 응원한다. 너무 오래 방황하지는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