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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n 21. 2024

나는 공이로소이다


안나 씨는 만족을 모르네요.



오래전 아르바이트 동료에게서 들은 말이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왜 그가 나에게 그런 돌직구를 날린 것인지 도무지 작은 단서조차 찾을 수가 없다. 



원인 불명의 그 말이 오늘날까지 구천을 떠도는 영혼처럼 내 마음 안을 맴도는 걸 보면 어지간히 핵심을 간파당했었나 보다. 


내가 그렇게 탐욕스러운 인간인가 곱씹어 보면 부정을 할 수가 없다. 물건도 사랑도 인정도 만족이라는 경계를 긋지 못하고 끝없이 나를 채워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것이 내가 술을 탐닉하게 만들었던 가장 큰 원흉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허무하고 공허한 기분이 드는 날이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입으로 무언가를 계속 집어넣었다. 주로 존재감이 확실하고 강력한 매운맛이었다. 구강을 통해 식도를 지나 위를 거쳐 장을 통과하는 내내 화전민이 밭에 불을 지르듯 나의 내부 장기에 뜨거운 캡사이신 불을 놓았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다량의 합법적 마취제인 알코올을 들이부었다. 일본어 교수님께서 나의 술부림을 보고 底なし(소꼬나시=바닥이 없음)라고 하셨는데 말 그대로 사무치는 공허감은 소꼬나시와 같아서 무엇을 집어넣어도 바닥이 뚫린 독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무망감 같은 것이 잠시 찾아오면 위와 같은 자학으로 이를 떨쳐버리려고 했었다. 지독하게 매운 음식을 먹거나 오늘만 살고 말 것처럼 죽자고 폭음을 하는 것은 마음의 공허를 잊게 하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술을 끊으니 매운 음식도 예전처럼 먹지를 않게 되었다. 


자극과 자극은 상극이 아니라 상생한다.


이제 외부의 무엇인가로 나를 달래려는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나의 내부에서부터 이 무망감을 처리해 보고자 선택한 것은 '반야심경'이다. 


원문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어려운 해설서로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야마나 테츠시의 쉽고 친절하게 풀어쓴 반야심경을 읽고 있다. 


탐욕이나 화는 내가 바깥(남)에 완전히 의존돼 있는데,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상태일 때 일어난다. 이 상태를 불교에서는 '어두움(무명, 무지,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탐, 진, 치 즉 탐욕, 화, 어리석음을 번뇌라고 한다. 


탐욕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강한 욕망이다. 애당초 탐욕이라는 것은 상승하는 에스컬레이터만 있고 하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야심경에서는 '모든 것은 공하다'를 강조한다. 공하다는 것은 마음도 몸도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서로가 서로를 조건 짓고 있으며 외부의 정보들은 우리의 감정과 조건 짓고 있다. 


외부의 모든 이미지는 '조건 짓기 네트워크'에 의해 나의 마음에 작용한다. 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은 그에 상응하는 잘못된 감정을 일으킨다.  


결국 공허함, 무망감, 허무함 같은 감정은 외부의 일에 대한 나의 해석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물건, 사랑, 인정 무엇이 되었든 한 외부의 힘에 기대기 시작하면 힘은 흰개미가 나무를 갉아먹듯이 내면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종국에는 나무가 쓰러지듯 마음도 무너져 버리게 것이다. 


어두운 공허는 번뇌의 상태와도 같다. 강하게 일어나는 욕망은 괴로움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번뇌에서 한 발 떨어져 볼 줄 아는 것. 


나는 空이로소이다.





표지그림 : 바실리 칸딘스키, <원 속의 원>,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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