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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l 07. 2024

하얀 옷은 아슬아슬해


여름에는 하얀색 옷을 선호한다. 하얀 블라우스, 새하얀 원피스, 하얀 반바지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생긴 하얀 티셔츠들이다. 물론 다른 색들도 있지만 하얀색 옷에 자꾸 손이 간다. 


그런데 이 하얀색 옷은 한겨울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몸가짐이 필요하다. 주차장에서 차의 표면을 쓸고 지나가지 않도록 몸을 수축시켜야 하고, 의자에 앉을 때 오염물질이 없는지 손으로 1차 검수과정을 거쳐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쫄면, 비빔국수, 떡볶이, 토마토소스 파스타 등등 맛있고 새빨간 음식들은 하얀 옷의 주적이다. 


집에 있을 때 하얀 옷을 입고 있다가 김치라도 볶아야 할라치면 바로 검은색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식당에서는 밝은 색깔의 옷을 입고 온 손님을 위해 앞치마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이 빨간 국물이 꼭 앞치마에만 튄다는 보장은 없다. 


어깨에도 튀고 목 언저리에도 튀며 알게 모르게 소매에도 튀어 여기저기 기어코 빨간 흔적을 남긴다. 하나의 흔적도 없이 선방을 한 날이면 '해냈어!!'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


밴쿠버에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온 오늘, 아들과 냉면을 먹으러 단골집에 방문했다. 나는 초록색 반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서 앞으로 몸을 내밀어 테이블에 잠깐 기대었다가 떼었다. 물을 마시려고 보니 배에 빨간 동그라미가 두 개 묻어있었다. 


휴지에 물을 묻혀서 박박 닦아보았지만 이미 빨간 염색은 요단강을 건너가 버렸다. 


하아...... 테이블 옆면에 김치국물이나 육개장 국물 같은 것이 묻어있었구나 싶었다.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이 사실을 일하시는 분께 전달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언제로 할지, 어떤 투로 말할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생각이라는 낚싯대는 기억의 바다에서 오래전에 겪었던 어떤 경험 하나를 건져 올렸다. 


///


때는 20대 초반,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당시에 서구적이고 독보적인 미모로 주가를 올리던 한 여배우가 지인과 함께  내가 일하던 카페에 손님으로 방문했다. 


다른 손님들도 힐끔거리며 볼 정도로 그녀는 참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테이블에서 두 잔의 커피를 주문받고 주방에서 제공받은 커피를 서빙했다. 


서빙을 하고 돌아서서 다른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아주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언니!!!"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외침이 들렸다. 


그녀가 예쁘기는 해도 어쨌든 나이는 나보다 많았으니 언니는 본인이지만 나를 '언니'라고 크게 외쳐 불렀다. 


이유인즉슨 커피 잔이 손잡이에서 빠져나와서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카페에서 사용하던 컵의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투명한 강화유리컵의 아래에 스테인리스 링이 끼워져 있고 그 링이 위로 이어져 손잡이 모양을 만들고 있는 형태였다. 


하필 여배우가 그 컵을 들어 올릴 때 지금껏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링에서 컵이 빠져나오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과연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 말처럼 까칠한 성격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모의 여배우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화를 냈다. 마치 내가 그녀에게 일부러 테러라도 할 요량으로 컵에 무슨 꿍꿍이를 한 것처럼 말이다. 


고작 스무 살의 한낱 아르바이트생인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저 죄송하다고 하며 테이블을 닦아주고 새 커피를 대령했을 뿐이다. 대역죄인 취급을 받은 게 너무 창피하고 억울했다. (오죽하면 아직까지 기억을....)


///


옛 기억에 잠시 멍해진 틈을 타 주문한 냉면이 도착했다. 일단 아들과 냉면을 맛있게 먹고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했다. 카드 단말기에 결제 완료가 뜨는 걸 확인하고 나는 일하시는 분께 내 배의 빨간 점 두 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그분은 옆쪽도 잘 닦는다고 닦았는데 미처 손이 안 닿았나 보다고 많이 미안해하셨다. 


집에 와서 바로 티셔츠를 세탁했다. 빨간 점은 주황색으로 톤다운을 했을지언정 과거 빨간 색이었다는 존재감은 여전했다. 그나마 다행히 티셔츠가 저렴한 것이고 이런 여름옷은 한 철 입고 처분하니 그렇게 속상하지는 않았다. 


내가 아끼던 다른 하얀 옷들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이렇게 하나의 옷을 버리게 되었지만 하얀 옷을 입고 정승처럼 서 있을지언정 하얀 옷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고는 순간이다. 어떻게 반응을 할지는 나의 선택이다. 


그때 나한테 신경질 내던 까칠한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성질 좀 죽였으려나? 




표지그림 : The Reluctant Fiancée, Auguste Toulmouche, 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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