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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l 12. 2024

해외 거주민의 집에 오는 손님

무조건적인 수용은 어렵다


나는 한국 이외에 3개국에서 생활을 했고 하고 있다. 20대에 일본에서 2년, 30대에 말레이시아에서는 6년간 거주했다. 40대에 캐나다에서는 4년 반 째 거주 중이다. 


해외에 살고 있으면 으레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이 방문을 하게 마련이다. 일본에서 살았을 때에는 나의 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따로 숙박 시설을 잡아야 했다. 친구들은 나의 기숙사에서, 하코네의 료칸에서, 동경에 사는 다른 친구의 집에서 돌아가며 숙박을 해결했다. 20대니까 가능했던 일이었다. 


말레이시아에 살 때에는 부모님이 세 번 정도 방문하시고 친구나 지인들이 몇 팀 나의 집에 머물렀었다. 반대로 내가 해외에 거주하는 지인집에 방문한 적도 있다. '지인'이라고 하지만 이모, 작은 아버지, 동생 등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동생이 살고 있는 시카고에 세 번 방문했는데 모두 동생의 집에서 머물렀다. 동생이 미혼일 때에도 결혼을 한 다음에도 미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관광'이라기보다는 '친선방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을 방문하던 입장에서 이제는 방문객을 받는 입장으로 역전이 된 상태이다. 내가 방문객으로 동생집을 찾았을 때에는 한국의 슈퍼에서, 면세점에서 선물을 잔뜩 준비하고 주유비에 보태라고 약간의 돈을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그럼에도 온전히 편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외식을 할 때, 슈퍼에서 장을 볼 때, 관광지에 방문할 때, 어디서부터 내가 지불하고 어디까지 내가 받아야 하는지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문한 사람의 입장일 때에는 큰돈 들여 비행기 표를 사고 먼 거리를 날아갔으니 밥 정도는 호스트가 제공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마음이었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십 년도 더 전에 나는 그랬다)


주객이 전도되어 방문객을 받는 입장이 되니 나의 생활 영역을 이만큼 양보했는데 밥 정도는 손님이 좀 살 수 있지 않느냐는 마음으로 변했다. 


돈도 돈이지만 손님들이 방문하면 자잘하게 챙겨야 하는 일들이 상당히 많아진다. 


말레이시아에 살 때 지인이 딸 둘을 데리고 놀러 온 적이 있다. 살림꾼이었던 지인은 처음에 설거지를 해주겠다고 나섰지만 부엌은 안주인 관할구역이라고 내 쪽에서 거절했다. 센스가 있었던 그녀는 내가 설거지를 시작하면 진공청소기를 들고 집안 여기저기를 밀고 다녔고, 세탁기가 종료 노래를 부르면 잽싸게 달려가 빨래를 꺼내어 널었다. 


그런 센스쟁이였지만 밖에 나가면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변모했다. 아이처럼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아주 사소한 말까지 모두 나에게 시키는 것이었다. 한 번 외출하면 진짜 어린이들 포함해서 어린이 4명을 이끌고 나들이를 다녀온 듯 진이 빠졌다. 


결혼 전 함께 여행을 많이 다녔던 절친이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우리는 특별히 이렇다 하게 부딪히는 마찰의 이벤트도 없었는데 무언의 압박, 공기 중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묘하게 마음이 상해 몇 개월 간 연락을 안 한 경험도 있었다. 


그런 경험들을 할 때마다 내가 동생네를 방문했을 때 '동생 부부가 이런 느낌이었겠구나'하는 것을 절절이 느꼈다. 


캐나다로 이사를 오고 나서 지금까지 집에 단 한 명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부르지도 않았다. 앞선 말레이시아에서의 어떤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건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는 부모님 조차 여태껏 한 번도 캐나다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하면 주위에서는 꽤 놀라는 눈치다. 이건 나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엄마와의 합작이다. 엄마는 '남의 집'에서 어떻게 몇 주씩 지내느냐고 하신다. 


반면, 아빠는 거의 해마다 동생이 있는 미국에 한 달가량 머무르신다. 엄마는 해방이고 동생은 속박이다. 


작년에 아빠가 동생 집을 방문하셨을 때 영상통화를 하는데 '내년에는 캐나다에 갈게'라고 하셨다. 말 그대로 셀프 초대를 하신 것이다. 나는 답했다. 


"아빠, 내가 초대하면 그때 오세요." 


나는 일은 안 하지만 나만의 일상으로 매일이 바쁘다. 이 집은 나의 집이고 나만의 하우스 룰이 존재한다. 손님이 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 루틴과 룰들이 깨어질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것이 단 며칠이라면 반가움과 즐거움 등으로 등가교환이 성립한다. 하지만 몇 주는 좀 다른 이야기이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불가능해진다. 


손님을 진심으로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해외 거주민을 배려해서 호텔에서 잔다는 손님을 억지로 자기 집에서 재운다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무조건적인 수용이 가능한 마음이 넓은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며칠 전 앞집 언니를 방문하셨던 언니의 친정어머니가 귀국을 하셨다. 한 달 좀 넘게 머무르셨다. 남의 집에 남의 어머니가 머무르신 한 달은 정말 쏜살같았다. 


앞집 할머니의 방문을 보고 아들이 '왜 우리 할머니는 안 오시냐'고 물었다. 이제 내년쯤이면 부모님을 초대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 같은 것을 떠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수용 범위는 최대 2주를 넘지 못하는 거 같다. 아니, 이것도 너무 길다. 내 생활을 침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이런 마음이 이기적인 마음일까?





표지그림 : <The Mealtime Prayer>, Fritz von Uhde, 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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