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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5. 2024

이모의 쇼핑법

산 거 또 사 


나의 이모는 미국에 사셨다. 뉴욕에서 의사로 근무를 하셨는데 위암에 걸려 50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되셨다. 이모를 떠올리면 큼지막한 안경, 투박하게 자른 검은 단발머리의 외모, 한 문장 한 문장 영어가 섞여있는 교포 특유의 말투가 생각난다.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엄마와 함께 쇼핑을 나갔다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모는 꼭 같은 옷을 두 벌씩 사셨다고 했다. 


20대의 나는 그런 이모의 쇼핑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른 종류의 예쁜 옷이 많은데 뭐 하러 똑같은 옷을 두 벌씩이나, 그것도 기본 디자인의 옷을 사는지 의문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깔별 구매'와는 결이 다른 쇼핑이었다. 한 디자인의 옷이 너무 예쁘고 색도 하나만 고를 수 없이 다 마음에 들 때 종종 여러 색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색 별로 구매를 하는 것은 색을 종류별로 갖고 싶은 '색에 대한 욕망'이지 똑같은 디자인을 두 벌씩, 때로는 같은 색으로 사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캐나다에 와서 살면서 언제부턴가 똑같은 색의 똑같은 옷을 두 벌씩 사는 경향을 나에게서 발견했다. 


-어라? 이거 '이모의 쇼핑법'인데? 


상황은 이러하다. 티셔츠를 한 벌 구매한다. 피부에 닿는 소재가 무척 부드럽고 소매기장이나 몸통도 아주 적당히 맞는다. 살다가 이런 옷을 또 만날 거라는 보장이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20대에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마음에 드는 원피스가 한 벌 있었다. 하늘거리는 소재의 여름 원피스였는데, 색이며 길이며, 소재며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원피스만 입고 나가면 다들 예쁘다고 한 마디씩 했다. 


나중에 원피스가 닳고 닳아 후줄근해져서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을 지경이 되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똑같은 걸로 하나 더 사둘걸.' 


그때의 생각이 머릿속에 뿌리를 내린듯하다. 나는 위에 말한 티셔츠를 하나 더 구입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종종 같은 디자인, 같은 색의 옷을 구입해 왔다. 


물건을 사서 쟁이는 사람들이나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불안'이다. 


또다시 이 정도의 퀄리티나 내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불안. 그것은 비단 의류뿐 아니라 식료품이나 그릇, 플라스틱 통, 책 등 우리들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 모두에 해당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과자나 쿠키 같은 것을 많이 쟁여두었는데 그것에도 불안이 깔려있다. 말레이시아는 국내 과자 브랜드도 있지만 많은 종류가 호주에서 수입된다. 


한 번 수입된 제품이 다 팔리면 금방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영영 안 들어오거나, 오래도록 기다려야 수퍼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먹어보고 맛이 좋은 것은 다량 구매를 해서 쟁여둬야 마음이 편했다. 


캐나다에 왔을 때 팬데믹이 터졌는데 그때 음식과 생필품, 해열제를 사두려고 전 세계가 얼마나 큰 소동을 겪었는지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식의 재앙급 불안이 아니어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불안에 시달린다. 


이번에 한국에서 비슷비슷한 디자인의 바지를 네 벌을 구입해 왔다. 두 벌은 L 브랜드, 두 벌은 Z 브랜드의 바지였다. 두 브랜드 모두에서 한 벌은 딱 맞는 사이즈로, 다른 한 벌은 여유가 있는 사이즈로 구입을 했다. 


L 브랜드에서 이미 두 벌을 구입했음에도 Z 브랜드에서 똑같은 작태로 바지 두 벌을 산 것은 나의 '불안'때문이었다. 


이렇게 내 몸에 잘 맞는 바지는 또 만나기 힘들어. 있을 때 사 둬야 해. 


이런 생각으로 이미 두 벌씩 구매한 바지들이 여러 벌 있다. 여러 벌 있다는 것은 살다 보니 또 다른 마음에 드는 바지가 나오기는 하더라는 뜻이다. 새 바지를 사면 이전에 산 바지 두 벌은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20대에 이해를 하지 못했던 이모의 쇼핑법이 40대가 되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 똑같은 옷을 두 벌씩 사는 마음. 불안에서 비롯되는 구매욕구. 구매를 하지 않았을 때 나중에 하게 될 후회에 대한 불안. 


이모의 쇼핑법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니 문득 이모가 그리워진다. 그곳에서는 불안 없이 행복하시기를.......





표지그림 : 앤디워홀, <Soup Cans>,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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