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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랑 Apr 16. 2023

마지막 여행

-2001년 인도차이나여행 중에-

“땡!”, “또 틀렸어? 그럼 바다!”, “땡!”     

베트남 해변 ‘나짱’에서 한 아이가 내게 넌센스 퀴즈를 내고 있었다. “너도 수영하지 그래?”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는 두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까지 수영하러 가면 누나 혼자 있어야 하잖아요.” 마음이 예쁜 아이였다.

     

처음 세 아이를 만난 곳은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프놈펜으로 넘어가는 배 안이었다. 1989년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지만, 그 시절만 해도 한국인 여행자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런 시기에 작은 배 안에서 한국어로 깔깔대고 수다를 떨고 있는 세 명의 대학생을 만난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넸고 그들도 여자 혼자서 여행하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여행이 그렇듯 우리는 스스럼 없이 자기를 소개했다. 이들은 모두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나보다 한 참 어렸다. 금세 ‘누나’, ‘동생’이 되었다. 이들은 태국에 오자마자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로 들어왔다. 씨엠립 ‘앙코르와트’를 둘러보고 수도 ‘프놈펜’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걸어서 국경 넘는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며 들떠 말하는 그들을 보니, 오래전 그때가 생각났다.

      

인도차이나 정세가 좋아져 여행자들이 앞다투어 들어 올 무렵이었다. 대개 태국에서 시작해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거쳐 다시 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라 자연스럽게 그들과 일정을 같이 했다. 우리는 프놈펜에서 호치민, 메콩강, 달랏, 나짱(나트랑)까지 오게 되었다. 그중 두 녀석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바다사자처럼 수영을 잘했다. 바다만 보이면 바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땡!"하며 넌센스 퀴즈를 내는 이 아이는 치의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곧 본과 3학년이 되는데, 이번 여행을 끝으로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고 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틈나는 대로 과외를 하고, 매 학기 장학금을 받는 속이 꽉 찬 수재였다. 바다사자, 철없는 두 녀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누나, 새 학기가 되면 너무 바빠서 이게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요.”

“나중에 돈 벌어 또 오면 되지. 마지막이라는 말은 하지마!”


하지만 나짱을 거쳐 다낭, 후에, 하롱베이, 하노이에 도착해서도 여행의 아쉬움이 남는지 ‘마지막 여행’이라는 말을 곧잘 내뱉었다.

     

여행하는 동안, 아플 때는 의학도라며 이것저것을 챙겼고, 밥맛이 없다고 하면 시장에서 죽을 찾기 위해 발품 파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해변에 있을 때는 수영을 못 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내가 적적할까 말벗을 해 주었다. “누나, 퀴즈 낼 게 맞춰봐요?” 틀리면 어김없이 낄낄거리며 "땡!"을 외쳤다. 그렇게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아니,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달이 어물어물 지날 무렵, 이 편안함이 구속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 자유로워지고자 홀로 떠나온 여행이었다. 세 아이와 같이 다니는 내내, 현지인과 이야기하거나 외국 여행자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여행 장소만 인도차이나지 한국 여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하노이에서 그들을 먼저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누나는 하노이가 좋아서 며칠 더 있으려고 해. 먼저 라오스로 들어가렴.”

아이들의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더 있겠다는 그들을 겨우 라오스로 떼어 보내고, 나는 홀로 ‘호얀끼엠’ 호수를 산책했다. 이제야 내 자리를 찾은 듯 홀가분했다. 예전처럼 몸짓언어지만 현지인과 대화를 했고, 다른 여행자와 함께 국경을 넘고 정보도 주고받았다.

     

라오스 ‘방비엥’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태국에서 만난 적 있는 외국인 여행자를 우연히 만나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세 녀석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인사라도 건넬까?’ 한 달 남짓 여행하면서 정이 든 아이들이라 인사만 하고 돌아서는 것이 오히려 찜찜했다. 못 들은 척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날 이후, 라오스에서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마침내 라오스 국경을 넘어 태국 수도 방콕에 돌아왔다. 그 당시 어느 나라를 가든 가난한 여행자들이 머무는 숙소는 손가락에 꼽았다. 나 역시 방콕에서 머물렀던 숙소를 다시 찾았다. 다음 날, 새벽이었다. “누나가 어제 도착한 거 같아. 말을 걸까 하다가 싫어할지도 몰라 그냥 모른척했어.” 저렴한 숙소라 벽을 타고 그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 새벽에 어디를 가려는지 짐을 부산하게 싸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태국 남부 해변으로 가는 듯했다. 이상하게 잘 다녀오라고 배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외면했던 마음이 미안해 그저 떠날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여행을 마무리 짓고 한국에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났을까? 신촌에서 우연히 바다사자, 한 녀석을 만났다. “누나!” 그는 반가워하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왜 그래? 여행은 잘했어?” “누나…”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그날, 태국 남부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수영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고, 갑작스럽게 심장마비가 와서 손도 못 써보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묻지 않아도 누구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의 말동무였던, 그 다정한 아이의 죽음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 장난치는 거지?”라고 되물었지만, 그 녀석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진실이라고 말해 주었다. 지나온 시간이 후회로 뒤엉켜버렸다. 그때 그 아이와 남은 일정을 함께 했다면 해변에 앉아 여느 때처럼 말동무로 남아 주지 않았을까? 그의 죽음이 마치 내 탓처럼 느껴졌다.

     

어느덧 20년도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그 아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당시 느꼈던 죄책감과 후회를 잊고 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득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제 받아들일 때가 되었겠지 싶으면,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처럼 한 번 꺼내면 주워 담기 힘들까 꼭꼭 숨겨 왔다. 물론 부모님의 죽음도 보았다. 하지만 그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오는 충격, 그때의 떨림은 지금껏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몇 년은 인도차이나를 방문할 수 없었고, 누군가가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면 질색팔색했다. 여전히 "땡!"하며 깔깔대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지막 여행"이라고 하더니 결국 마지막 여행이 돼버린 아이의 아픈 사연을 이제는 바람에 훨훨 날려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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