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랑 Apr 28. 2024

새끼손가락 걸고

이별연습(02. 산책)

“꾸씨! 산책가자.”

라는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그가 이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반려견 꾸씨는 실외에서만 배변 활동을 했기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산책을 하러 나가야 했다. 그래서 “산책”이라는 말만 들리면 꼬리를 흔들며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그런 녀석이 한 달간 통영에서 살고 온 이후로 좀처럼 나가려 하지 않았다. 특히나 저녁 약속이 있는 날, 그의 외출 거부는 나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약속 시간에 늦겠어. 빨리 산책 갔다 오자.” 

통영 한달살이를 끝내고 올라온 지도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와 한참 동안을 실랑이하고서야 산책을 나섰다.      

올해 1월, 간만에 긴 휴가를 받았다. 예전 같으면 외국 어느 마을에서 콕 박혀 보냈을 텐데. 꾸씨가 눈에 밟혀 도저히 홀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소 멀어서 가지 못했던 통영 동피랑에 둥지를 틀었다. 통영은 고요하고 가볼 곳이 많아서 한 달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더구나 150개가 넘는 주변의 섬은 꾸씨와 산책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섬으로 나설 때마다 매번 시간을 놓쳐 배는 타보지도 못하고, 동피랑 산책을 지겹게 반복했다. 나의 게으름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꾸씨! 오늘은 꼭 타야 해! 배표를 미리 끊었어!” 

출항 시간을 놓칠까 봐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섬에 가서 먹을 간식과 추위를 위한 여분의 옷가지를 챙기느라 짐을 풀고 싸기를 반복했다. 결국 배 시간이 바싹 닥쳐서야 집을 나섰고, 늦을세라 꾸씨를 안고 여객선터미널까지 뛰었다. 우리는 무사히 비진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드디어 가는구나! 비진도까지는 뱃길로 40여 분, 섬으로 겹겹이 싸인 아름다운 한려수도에 반쯤 넋이 나간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꾸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매서운 바닷바람에 제대로 눈도 못 뜨고 덜덜 떨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를 꼭 껴안고 따뜻한 선실로 들어갔다.      

비진도의 유명한 길은 3시간 이상 걸리는 산호길이다. 그 길을 돌아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여유로운 산책을 위해 외항선착장, 비진암, 후박나무자생지를 거쳐 돌아오는, 쉽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소요 시간은 1시간 40분이었다. 급경사로를 제외하면 그 길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길에 올랐다. 때마침 우리와 동선이 같은 한 가족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올라갔다. 한참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미인전망대(해발 290m)에 도착했다. 

“강아지가 참 잘 올라가네요. 조금 더 올라가면 선유봉도 있어요. 그곳을 지나면 완만한 길이 나오는데 멋져요.” 

두 번째 방문한다는 아주머니가 꾸씨를 쓰다듬으며 돌아가는 길을 추천했다.     

마지막 배 시간까지는 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올라오는 데 1시간 걸렸으니, 내려가는 데 40분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아주머니 말대로 얼마 안 가서 비진도 정상, 선유봉에 도착했다. 트래킹을 즐겨하는 내게는 한달음에 갈 수 있을 곳이었다. 정상까지 올라왔다는 기쁜 마음에 즐거워할 꾸씨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리고 헉헉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강아지에게 장시간의 산행은 고행의 길이었을 것인데 내 기분만 생각했다.     

“꾸씨! 미안해. 이제부터는 완만한 길이라니까 힘내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잃어버린 장갑을 찾아서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야 했다. 몇 번을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장갑은 찾았지만 꾸씨는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마지막 배 도착시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제법 무거운 그를 포대기에 싸서 품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30분을 내려왔다. 여전히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다시 비탈길을 냅다 달렸다. 이정표도 없어서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도 했다. 내리막길에 미끄러져 발을 접질렸다. 아픔도 몰랐다. 앞으로 남은 시간 10분, 포기하려고 할 때 저 멀리 선착장이 보였다. 과연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두 발은 뛰고 있었다. 막 선착장에 도착해서야 그를 내려놓고 땀으로 젖은 두꺼운 긴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참았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마침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꾸씨는 돌아오는 내내 힘들었는지 축 늘어져 잠을 잤다. 접질린 발도 아파왔지만, 그가 깰까 봐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그 힘들다는 비진도 산호길을 걸어 온 것이다. 내 욕심에 이번에도 무리한 산책을 하고 말았다. 나는 늘 12살 노견인 그와 더 많은 추억을 쌓으려고 조바심을 내왔다. 그에게 한 번도 그날의 산책이 즐거웠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산책’이라는 말에 도망치는 꾸씨를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누구를 위한 산책이었을까? 흘러가는 세월은 느리다고 조금 늦었다고 모자라는 법이 없다. 반면에 빠르다고 조금 앞선다고 완벽한 법도 없다. 그저 시간이 가는 대로 쌓이는 것이 추억이라면 노견의 행복한 추억은 냄새 쌓이는 곳에 있지 않았을까? 그를 위한 산책이라고 하면서 결국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지난 일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이제부터는 그만을 위한 산책을 하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설프게 만나 인생길 동무가 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