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내 취미활동이 먹고 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철저히 비생산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 그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그런데 덕질도 제대로 몰입하면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다.
2011년 겨울,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명색이 사범대생이었지만 4년 내내 전공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나는 임용시험은 일찍이 포기한 상태였다.
동기들은 대부분 재수에 돌입했지만, 나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시험공부만 하다가 피 같은 20대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과감히 임용의 굴레를 던질 수 있었던 건 결국 그들보다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열망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기도 했다.
고향으로 내려와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내 눈에 한 공고가 포착되었다. 보아하니 충실히 공부하기만 하면 붙을 수 있을 것 같은 시험이었다. 나는 그길로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를 당장 그만두고 전업 수험생 생활을 시작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내가 공고를 본 날부터 시험일까지는 한 달 조금 넘는 기간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계획을 세워본 결과 매일매일 쉬지 않고 공부만 해야 필요한 공부량을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비인간적인 생활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침 9시까지 독서실에 가서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오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나는 결심한 대로 잠시도 딴짓하지 않고 성실히 공부에 집중했다. 식사 시간 때조차 한 손에는 영어단어장을 쥐고 눈으로는 단어를 외우면서 밥을 먹었다. 그래서 메뉴도 한 손으로 한입에 넣기 쉬운 김밥만 선택했다. 인강을 보다가 졸리면 화장실에 가서 찬물 세수를 하며 잠을 깨웠다.
그 치열한 수험생활 중에 내게 힘이 되어준 것이 바로 드래곤 볼이었다. 짧은 시간에 고도로 집중해 공부해 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겪어봤을 것이다. 두뇌에 과부하가 걸려 더 이상 아무것도 집어넣을 수 없는 상태를. 마치 머리에서 금방이라도 뜨거운 김이 쉭쉭 소리를 내며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럴 땐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라도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그 짧은 쉬는 시간 동안 내가 본 것이 드래곤 볼 애니메이션이었다.
마침 그때 일종의 애니메이션 개정판이 방영되는 중이어서 나도 인터넷을 통해 최근 방영분을 시청할 수 있었는데, 30분 남짓한 그 시간은 지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아주 귀중한 휴식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힘을 얻은 것은 새로 삽입된 오프닝과 엔딩 곡이었다. 드래곤 볼 류의 만화 주제가들이 다 그렇듯이 힘을 내자, 할 수 있다, 류의 가사였지만 그때는 그 뻔한 내용이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는지 모른다.
신나고 활기찬 주제가를 듣고 있으면 아무리 강한 적이 등장해도 고된 수련과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는 손오공 일행처럼, 나도 열심히 하면 시험공부라는 거대한 악당을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험생이 다 그렇듯이 나도 가족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이 없었기에 노랫말은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 수험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드래곤 볼의 응원을 받으며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하루하루가 흘러갔고, 드디어 시험을 일주일 남겨놓은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 않더니 일어나서 한 걸음 떼기도 어려울 만큼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탈진해버린 것이다.
독서실 의자는 고사하고 집 소파에 앉아있기도 힘들 만큼 몸살이 심했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결국 병원에 가서 링거 주사를 맞았다. 주삿바늘을 왼팔에 꽂고 있으려니 허탈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일주일을 남기고 병이 나다니.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이번에 떨어지면 그것도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만큼 후회 없이 온몸을 내던져 공부했기에, 이렇게 된 것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컨디션 회복에 소비한 후 복습도 얼마 하지 못한 채로 시험을 치렀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다른 수험생들의 답안과 비교해서 가채점을 해보니, 기대한 점수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에이, 이번엔 틀렸구나. 나는 그렇게 단념하고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몇 주 뒤, 합격자 발표가 났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것도 지역에서 가장 높은 점수로.
12년이 지난 후 그때를 돌이켜보면, 내게 그런 열정이 있었나 싶을 만큼 모든 것을 불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고된 수험생활을 지탱해 준 나의 오랜 덕질 대상인 드래곤 볼이 있었다.
혹자는 무슨 만화를 보고 의욕을 얻냐고, 너무 오버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이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불건전하거나 반사회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괜찮은 것 아닐까. 나 같이 취미가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사람은 그 좋아하는 대상에서 삶에 도움이 될 만큼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매거진을 하나 개설해가면서까지 드래곤 볼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 시리즈를 읽어주시는 분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힘든 시간을 극복하고 좋은 날을 많이 누리셨으면 좋겠다. 노랫말처럼 '미래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