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더 전은 만화 드래곤 볼의 정점이자,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지금의 명성을 만든 전설적인 사가(Saga)다. 사이어인 전은 프리더 전의 프리퀄로 볼 여지가 있고, 셀 전과 마인부우 전은 단점이 명확하다. 그러나 프리더 전은 설정, 플롯, 작화, 재미 등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과시한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전부 뛰어나기 때문에 어디에 주목해서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왜 이때의 드래곤 볼이 그토록 훌륭한지 하나하나 짚고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개인적인 호오로 치자면 프리더 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토리는 아니다. 분위기가 시종일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다. 그러나 대부분의 팬이 작품성 측면에서 베스트로 치는 이 파트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고서는 드래곤 볼을 논했다고 할 수 없다.
프리더 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드래곤 볼을 둘러싸고 벌이는 쟁탈전, 다른 하나는 프리더와의 전투다.
크리링과 오반은 지구에서 아마도 몇억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을 외계행성, 나메크 성에서 지옥의 6일을 보내게 된다. 악의 세력 베지터와 프리더도 같은 목적, 즉 드래곤 볼 수집을 위해 나메크에 왔기 때문이다.
이 3세력이 드래곤 볼을 두고 벌이는 쟁탈전은 독자에게 극한의 스릴을 선사한다. 크리링 일행은 무려 7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들이 압도적으로 강한 베지터와 프리더에게 들키지 않고 살아남아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덕분인데, 기를 숨기는 능력과, 드래곤 레이더다. 이 두 무기를 이용해 그들은 악당 세력과 밸런스를 맞추며 암중모색한다.
3세력의 물고 물리는 추격전은 감탄이 나올 만큼 짜임새가 훌륭하다. 누구도 드래곤 볼을 다 모으지 못하는 상황은 엄청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킨다.
크리링이 방심한 사이 은신처를 들켜, 어렵게 구한 드래곤 볼 한 개를 베지터에게 헌납하는 장면을 보자. 베지터는 자기가 숨겨둔 또 다른 볼을 오반이 몰래 찾아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드래곤 볼을 다 모았다며 기뻐한다.
오반은 베지터가 숨겨둔 볼을 은신처로 가지고 가다가, 크리링이 준 볼을 든 베지터를 마주친다. 만약 여기서 오반이 볼을 뺏기면 베지터가 드래곤 볼을 다 모으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오반은 볼을 바위 뒤에 숨기고 혈혈단신으로 베지터를 마주한다.
이때 손에 들고 있던 드래곤 레이더의 정체를 들킬 뻔하지만, 시계라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해 의심을 벗어난다. 베지터는 드래곤 볼을 다 모았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좋은 나머지 오반을 살려주지만, 잠시 후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한다.
이렇게 크리링과 오반이 수없이 위기에 빠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구도가 계속되고 베지터 역시 나름대로 프리더 세력을 피해 가까스로 살아남으면서, 만화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하는 팽팽한 긴장이 이어진다.
이 시기에 크리링이 보여준 리더쉽은 특기할 만하다. 오공이 없는 상황에서, 크리링은 강하긴 하나 아직 너무 어린 오반 대신 리더를 맡아 훌륭한 판단력을 선보인다. 태양권으로 도도리아를 피해 덴데를 구하고, 최고 장로에게 오반을 데리고 가서 잠재력을 일깨운다는 아이디어는 다 크리링의 것이었다. 그의 결단은 이후의 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아군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3세력 중 누구도 드래곤 볼로 소원을 이루는 데 실패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리더와의 전투가 개시된다. 이론의 여지는 있으나 나는 프리더가 드래곤 볼 전체를 통틀어 최악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더의 강함을 나타내는 장면으로는 인터넷 밈이 된 ‘내 전투력은 53만입니다’ 컷이 가장 유명하지만, 나는 다른 씬을 더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프리더가 근처를 날아가기만 했는데도 상상을 초월하는 기를 느끼고 두려움에 벌벌 떨던 크리링과 오반의 묘사가 그것이다.
오공이 죽기 직전까지 가면서 간신히 막았던 베지터보다도 비할 수 없이 강하다는 표현과, 계왕이 프리더와의 싸움을 기를 쓰고 반대하는 장면 등, 최고 보스이자 최후의 빌런으로서의 위상이 강조된 부분이 유달리 많다. 심지어 3번이나 변신이 가능하고 그때마다 엄청나게 파워업한다는 사실은 저 괴물의 힘에 끝이 있긴 한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3단 변신의 임팩트는 너무나 강렬했는데, 그중에서도 마지막으로 변신한 모습을 처음 봤을 때의 섬뜩함은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체구는 작아졌으나 눈매가 훨씬 매섭고 사악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 최후의, 최종의 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파워업 패턴과는 다른, 획기적이면서 경이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상대가 변신을 한다면 우리도 변신으로 대응해야 될 터. 여기서 드디어 그 유명한 초사이어인이 등장한다.
초사이어인은 발상과 출현도 놀랍지만, 변신 계기가 가장 인상적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초사이어인이 되려면 극도의 ‘분노’ 를 느껴야 한다.
이때 오공이 분노한 이유가 중요하다. 프리더가 크리링을 죽였고, 그는 이미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으므로 드래곤 볼로도 되살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원인이다. 즉 오공은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보고 분노한 나머지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는 초사이어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오공이 주위 사람들에게 별다른 애정 표현을 하지 않는 무덤덤한 성격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감동적이며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작품의 대주제 중 하나인 ‘우정’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초사이어인의 등장은 드래곤 볼의 시대를 또 다른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프리더와의 전투 이후로는 초사이어인 이상의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아예 싸움에 참여조차 못하는, 전력 외 취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셀 전도 마인 부우 전도 최소 초사이어인은 되어야 뭘 어떻게 해볼 수라도 있게 된다.
프리더 전의 작화는 나처럼 만화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일반 독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훌륭하다.
프리더는 오공에게 묻는다. 공중전과 육탄전 중 어느 쪽을 선호하냐고. 오공은 후자를 택한다. 이는 작가 본인의 선택이나 다름없다. 이 선택이 놀라운 이유는, 내 추측이지만 육탄전은 공중전에 비해 배경 묘사나 격투 씬 창작이 훨씬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맞붙어 싸울 때 배경이 되는 바위와 절벽의 묘사를 보면, 어떻게 이토록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지 감탄만 나온다. 온갖 공격을 받아내느라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암석의 모습 또한 너무나 사실적이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프리더가 나메크 성을 말 그대로 잘라버려서 별이 폭발할 위기에 처하는데, 소멸 직전의 절망적인 행성의 모습이 매우 리얼하다.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른 그림이다.
그뿐 아니라 육탄전은 두 다리가 자유로운 공중전에 비해 움직임의 범위가 제한적일 텐데도, 결투 씬이 매 컷 참신하기 그지없다. 작가가 아무리 홍콩 무술영화의 열혈 팬이었다 하나 2차원의 종이 위에 그토록 생생히 다채로운 동작을 재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프리더 전이 전설인 이유로는 앞서 언급한 요인 외에도, 전투의 현장인 나메크 성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 드래곤 볼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면서 자칫 악인에게 당하는 약자로만 남았을 뻔한 나메크 인은, 다행히 중요한 타이밍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아 활약한다.
덴데는 신비한 초능력으로 다친 우리 편 전사들을 회복시켜 주고, 나메크 어로 용신을 불러내준다. 어느 이름 모를 장로는 프리더 일당의 스카우터를 모두 파괴했으며, 최고 장로는 오반과 크리링의 잠재된 파워를 끌어낸다. 네일 역시 프리더가 소원을 빌지 못하도록 시간을 벌어준다.
나는 특히나 네일이라는 캐릭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최고 장로의 보디가드이자 선의 수호자로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프리더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도록 막는다. 게다가 동화라는 신비한 현상을 이용해 피콜로가 훨씬 더 강해지도록 돕기까지 한다. 그의 숭고한 희생은 프리더의 추악한 행위와 대조를 이루며 단연 돋보인다.
드래곤 볼이 시종일관 핵심 아이템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도 프리더 전의 특색이다. 만화 제목이 드래곤 볼이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격투 노선을 탄 이후에는 드래곤 볼 자체가 줄거리 상 중요한 목표였던 적은 의외로 별로 없다. 오공 일행이 너무 강해진 나머지 용신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더 전에서는 앞서 말했듯 프리더와 베지터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크리링 일행은 그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드래곤 볼을 노린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한쪽이 볼을 다 모았을 때, 돌발상황이 발생하면서 또 한 번 큰 재미를 선사한다. 바로 언어의 문제다.
나메크 어가 아니면 용신을 부를 수 없다는 규칙,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 규칙으로 인해 등장인물들은 곤경에 처한다. 거기다 얼마 남지 않은 최고 장로의 수명이 다하면 드래곤 볼도 사라진다는 설정까지 덧붙여져, 어마어마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덴데의 통역으로 드디어 용신을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세 개의 소원 중 하나만을 남겨두고 최고 장로의 수명이 다하도록 한 것은 향후 줄거리까지 고려한 치밀한 전개였다.
그 나머지 한 개의 소원을 정하는 과정이 또한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우선 지구의 드래곤 볼로 최고 장로를 살리고, 나메크의 드래곤 볼까지도 되살린다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계왕이 떠올린 이 방법으로 오공 일행은 하나 남은 마지막 소원을 빌 수 있게 됐고, 이로써 오공과 프리더를 제외한 전원을 폭발 직전의 나메크 성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두 행성에 존재하는 두 종류의 드래곤 볼을 연쇄적으로 이용해 모두의 목숨을 구한 이 발상은 실로 신의 한 수라고 하겠다.
친구들이 무사히 지구로 옮겨지자 마음이 편해진 초사이어인 오공은 이내 프리더를 제압하고, 본인도 별이 소멸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탈출한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트랭크스의 출현과 프리더 전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셀 전의 시작이다.
80년대 당시에 실시간으로 만화를 봤던 분들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어떻게 참았을까? 연재 분량이라고 해 봤자 고작 열 장 남짓했을 텐데, 얼마나 감질났을까. 프리더 전 – 셀 전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처음부터 단행본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어마어마한 재미와 흡입력을 자랑하는, 드래곤 볼의 최절정기이자 황금기다.
(원래 총 10개의 글로 매거진을 끝내려고 했는데, 마인부우 전에 관해 쓰지 않을 수 없어서 하나만 더 쓰려고 합니다. 셀 전은 이전 글들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넘어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