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볼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전투, 사이어인 전

by 세온

드래곤 볼에서 사이어인 전과 프리더 전은 매우 중요하다. 이 파트가 없었다면 만화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와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더 전은 수많은 팬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스토리로 꼽으며, 그 전에 벌어진 사이어인 전은 만화의 세계관 자체를 바꾸어놓은 대전환점이다. 오늘은 먼저 사이어인과 벌인 전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오공이 외계인이었다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선이 지구에 착륙한 날, 우리의 주인공 오공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우주선에서 내린 이는 오공의 친형을 자처하는 라데츠라는 사람으로, 등장인물과 독자를 전율케 한 출생의 비밀을 폭로했다. 오공이 사이어인이라는 외계 종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창의성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플롯을 치밀하게 짜는 편이 아니다. 아주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분명 오공이 외계인이라는 설정도 처음부터 미리 정해놓은 것이 아니고 저 시점에 새로 만들어 낸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개연성이 없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오공이 외계인이라니 말도 안 돼, 라는 반응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새 설정이 놀랍고 흥미로웠다. 즉 매우 ‘말이 되었다.’

특히 ‘전투민족 사이어인’이라는 개념은 너무 신선하면서도 그럴 듯해서 신기할 정도였다. 싸우기 위해 태어난, 싸움을 좋아하는 종족, 죽기 직전까지 싸우다 살아나면 더 강해지는 종족, 더 센 적이 나타날수록 흥분하는 종족. 그때까지 보여준 오공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그리고 앞으로의 스토리에도 딱 들어맞는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라데츠의 등장은 어마어마한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오공의 비밀을 폭로한 후 대뜸 어린 오반을 납치해 버리질 않나, 지구에서 최강이던 오공과 피콜로가 함께 덤벼도 끄떡없질 않나, 오공이 죽어버리질 않나, 피콜로가 오반을 데려가 훈련을 시키질 않나. 시리즈 전체에서 이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오공 와이프 찌찌가 기절해버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라데츠는 죽기 전 자기보다 훨씬 강한 사이어인 두 명이 지구를 침공할 거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을 남긴다. 그리고 일 년 뒤, 정말로 그들이 왔다.

가장 처절한 전투

나는 사이어인들과 벌인 그날의 전투가 드래곤 볼 전체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이었다고 평가한다. 그전에도, 후에도 그토록 처참하고 치열한 교전은 없었다.


우선 단 몇 시간 동안 오공의 친구이자 지구 최강의 전사들이 거의 다 죽어 나간다. 맨 먼저 야무치, 그리고 천진반과 차오즈, 피콜로까지 차례로 사이어인 내퍼에게 죽임을 당한다. 저승에서 오공이 도착하기 전까지 살아남은 건 크리링과 오반 둘 뿐이었다.

이전까지는 아무리 강한 악당이 등장했어도 무천도사와 크리링을 제외하면 주요 인물이 죽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한꺼번에 수 명이 죽어 나가지도 않았다.

심지어 뒤늦게 도착한 오공조차 또 다른 사이어인인 베지터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된다. 만화 전체를 통틀어서 오공은 이때 가장 심하게 다친다. 이 과정의 묘사는 굉장히 잔인하고 참혹해서, 최소 15금 딱지 정도는 붙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면 베지터는 무사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구인 진영에 남은 단 세(네) 명 – 오공, 크리링, 오반, (+ 야찬) - 의 저항이 너무나 극렬했기 때문에, 그 강한 베지터조차도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는 상태가 되도록 처절하게 당한다. 양쪽이 전투불능의 상태가 될 때까지 끝장승부를 벌인 것이다.

총.력.전.

양쪽 진영은 서로를 끝장내기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전투의 전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오공 : 2배 계왕권 발동

오공 : 3배 계왕권 발동

베지터 : 갤리크 포 발사

오공 : 4배 계왕권 에네르기파 발사

베지터 : 거대 고릴라로 변신(꼬리가 있는 사이어인은 보름달을 보고 변신이 가능한데, 전투력이 10배가 된다.)

오공 : 원기옥 사용 실패, 전투불능 상태가 됨. (이때 오공의 대사가 처량하다. ‘난 이제 코딱지 팔 힘도 없어. 네 맘대로 해라.’)

크리링, 오반 : 전투 현장 복귀

야찬 : 거대 고릴라의 꼬리 절단, 평범한(?) 베지터로 복귀시킴

오반 : 열받은 베지터와 육탄전 벌임

크리링 : 오공에게 이어받은 원기옥 발사(베지터가 너무 빨라 원기옥을 맞출 수 없다는 크리링의 말에 기술의 창시자인 계왕이 주는 팁이 인상적이다. ‘원기옥은 눈으로 보고 맞추는 게 아니다. 악의 기를 느끼고 발사해라!’)

야찬 : 얼른 쏘라고 크리링에게 외침..으로써 타이밍 방해

베지터 : 원기옥을 피함

오반 : 원기옥을 받아치고, 베지터가 정통으로 맞음

야찬 : 큰 타격을 입은 베지터를 공격

오반 : 보름달을 보고 거대 고릴라로 변신(죽기 직전의 오공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오반에게 달을 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처절함 그 자체다)

베지터 : 변신한 오반의 꼬리를 자르는 데 성공하지만 거대 고릴라에게 깔림, 우주선으로 기어가 도주 시도

크리링 : 야찬의 칼로 저항 불능 상태인 베지터를 죽이려 함

오공 : 크리링을 설득해 베지터를 살려보냄, 지구를 지켜 냄...

이때 오공이 베지터를 살린 이유는 ‘강한 놈을 내가 나중에 혼자 처치하고 싶다’였는데,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베지터가 나중에 우리 편이 된 건 결과론이고 저 시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나쁜 놈이자, 나중에도 물리칠 가능성이 낮은 무지 강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베지터를 살린 이유는 작가와 편집진이 나중에 등장한 더 큰 전쟁, 프리더 전에 등장시키기 위해서였다고밖에는 보기 힘들다.

조연들의 빛나는 활약

내가 사이어인 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앞에서 묘사한 극도의 치열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지구인 전사들이 활약한 마지막 전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공이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인 야무치, 천진반, 차오즈는 내퍼를 상대하며 오공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나중에 크리링 일행이 나메크 성까지 간 이유도 드래곤 볼을 모아 친구들을 살려내기 위해서였다.

다만 이들은 되살아난 후에도 예전처럼 전투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지는 못한다. 프리더 전 이후 적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면서 우리 편에서 상대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사이어인이나 피콜로밖에 없어지고, 지구인들은 공의 옛 친구 역할로 남게 된다.

그런데 이 친구들 무리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나메크 성에 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크리링이다. 나는 예전부터 작가가 왜 하필 크리링만 살렸는지 궁금했다. 나메크 성에 갈 사람으로 한 명의 생존자는 필요했겠으나, 그게 야무치나 천진반이 아닌 크리링이었던 이유는 뭘까?

토리야마의 성격상 크리링이 죽음으로 오공이 초사이어인이 되는 훗날의 전개까지 고려했을 것 같진 않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나메크 성에서 보여준 활약을 생각하면 생존자로 크리링을 고른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베지터와 싸울 때도 크리링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오공에게 원기옥을 넘겨받고, 거대 베지터의 꼬리를 자르려 시도하는 등 친구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베지터를 최종적으로 처치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갔다.

오반 역시 크리링과 함께 최후까지 남아서 아버지를 구했다. 유치원생 나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베지터와 맞붙어 싸우며 크리링이 원기옥을 넘겨받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알고 한 건 아니었지만)보름달을 보고 거대 고릴라로 변신함으로써 베지터에게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혔다.

이 두 사람이 보여준 용기와 투지가 특히 인상적인 이유는 프리더 전 이후로 최후의 결전은 오직 최강자 한 사람의 몫으로만 남기 때문이다. 나메크 성이 폭발할 때까지 프리더를 상대한 건 오공 한 명이었고, 셀과 끝까지 대결한 유일한 사람은 오반이다. (마인부우 전은 양상이 좀 다르다)

그리고 대부분 위험에 빠진 동료를 구하러 오는 포지션은 오공이 맡는데, 이때만큼은 역으로 크리링과 오반이 죽을 위기에 처한 오공을 구하러 온다. 가장 친한 친구와 혈육이라는, 세상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가까운 관계에서 지원을 얻는 것이다. 그 모습이 의리 있고 든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던 베지터와의 일전을 치른 세 사람, 크리링과 오반, 오공은 곧 지구가 아닌 저 멀고 먼 외계의 행성에서 사상 최강, 최악의 적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드래곤 볼이라는 만화를 전설로 만든다. 다음 편에서는 프리더 전을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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