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볼이 완결된 지 30년이 넘은 지금, 마인 부우 전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높지 않다. 프리더 전과 셀 전에서 보여준 짜임새와 개연성을 상당 부분 잃었기 때문이다. 작화 면에서도 작가 스스로 마인 부우 전은 힘을 빼고 그렸다고 할 만큼 이전 편에 비해 덜 훌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드래곤 볼의 모든 에피소드 중에서 부우 전을 가장 좋아한다. 사이어인 전 후 비장하기만 했던 작품의 기조가 한결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오공이 성인이 된 이후 제일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부우 전은 일종의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진작부터 만화를 끝내고 싶어 한 작가를 일본 문화부 차관과 출판사 편집부가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억지로 계속 그리게 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부우 전은 일종의 덤으로 치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즐겨도 된다고 본다. 안 끝난 게 어딘가.
심지어 지금은 부우 전을 싫어한다는 팬조차 연재 당시에는 무척 재미나게 봤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 정도로 드래곤 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작가 본인을 제외하면) 만화가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7년 세월과 평화, 하이스쿨 편
부우 전 중에서도 하이스쿨 편, 즉 천하제일 무술대회가 열리기 전의 이야기는 내 최애다. 무려 7년을 단숨에 뛰어넘어 등장인물들이 몰라보게 변하는 데다가 오랜만에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특히 오반이 고등학생이 되어 평범한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이야기가 신선하고 흥미롭다. 야구 경기 때 자기 힘을 숨기지 못해서 8미터를 점프해 공을 잡는다거나, 데드볼을 피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기행을 벌이는 점이 재미있다. 그레이트 사이어맨이라는 요상한 이름과 해괴한 복장으로 정의의 사도 노릇을 하고 다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개그 씬이다.
변화한 베지터와의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셀 전까지만 해도 완벽한 아군이라고 할 수 없었던 베지터가, 어느새 오반에게 아빠 친구의 남편, 혹은 동생 친구의 아빠 위치가 되어 있다. 부르마네 집에 갔다가 마주쳤을 때 안녕하세요, 하며 공손하게 인사하는 오반과 무뚝뚝하게나마 인사를 받아주는 베지터의 모습은 격세지감이다. 한때 필사적으로 서로를 죽이려 했던 관계라고 믿기지 않는다.
비델과 오반의 (데이트를 빙자한) 무공술 훈련도 중요한 에피소드다. 좋아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비델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오반, 둘의 삐걱거리는 모습이 순수하고 귀여워서 절로 엄마 미소를 짓게 된다.
이런 소소한 일상이 이례적으로 단행본 한 권을 채울 만큼의 분량으로 그려지는데, 큰 긴장감이나 스릴은 없지만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드래곤 볼 특유의 유머를 즐길 수 있다는 게 하이스쿨 편의 매력이다.
대환장 잔치, 오천크스와 부우
마인 부우 전에서 가장 빛나는 개그 씬이라고 하면 역시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벌어진 오천크스와 부우(여기에 피콜로까지 가세한)의 전투를 꼽을 수 있다.
오천과 트랭크스는 후기 드래곤 볼의 빛과 소금이다. 아이다운 장난기와 발랄함으로 큰 웃음을 선사하는 동시에 전혀 아이답지 않은 파워로 주요 전력으로 활약한다. 둘이 퓨전으로 합체해서 만들어진 오천크스라는 어린이는 어째 오천의 순진함보다는 트랭크스의 건방짐을 물려받아, 허세가 우주 최강이다.
오천크스에게는 최악의 적을 상대하며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오반의 처절한 유년 시절과 비교할 수 없는 장난기와 짓궂음이 있다. 작품 경향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고단한 어린 시절을 보낸 오반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부우 역시 프리더와 셀에 비교하면 유치한 어린애나 다름없다. 악당이긴 하나 매우 똑똑하고 카리스마 넘쳤던 앞의 두 선배(?)에 비해, 부우는 단순하고 참을성이 없다. 사악한 정도도 저 둘에 비하면 덜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부우 전은 드래곤 볼 사상 초유의 지구 멸망이라는 사태가 진짜로 발생하는데도 그다지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른의 무게
사이어인 전 이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한 성인의 면모를 보여준 오공이지만, 부우 전에서의 언행은 특히나 듬직한 어른의 것이다.
자기는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지구의 일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안 된다고 판단해, 평소의 유한 성격을 버리고 두 어린이에게 매우 엄격하고 냉정하게 퓨전을 가르치며, 어떠한 위기에서도 침착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 증거다.
저세상으로 다시 떠나기 전 오천을 꼭 안아주고, 오반의 장성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말할 때는 애틋한 부성애도 느껴진다. 여자와 남자도 구별하지 못하고 결혼이 뭔지도 몰랐던 어린 오공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베지터 역시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고, 오공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괄목할 내적 성장을 이룬다.
이 두 어른은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얻은(=허구한 날 싸움질만 하면서 키운) 노련함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그중에서도 계왕신 계에서 벌어진 부우와의 마지막 결전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콤비플레이는 부우 전의 백미다.
특히 베지터는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오공에게 원기옥을 만들라고 주문하고, 오공이 원기옥을 충분히 강하게 발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체력 문제라는 것을 눈치챈다.
그의 낭패감 가득한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덴데가 용신에게 손오공의 체력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달라고 소원을 빌고, 오공은 단숨에 초사이어인으로 변신하여 원기옥을 밀어붙인다. 그대로 마인 부우는 깨끗이 소멸, 최후의 전투는 막을 내린다. 이때 마지막 남은 승리의 퍼즐을 맞추는 주체가 드래곤 볼이라는 점이 멋지다. 만화 이름이 왜 드래곤 볼인지 보여준 장면이었다.
10년 후
최종 챕터에 등장하는 10년 후 등장인물의 모습을 살펴보면 쏠쏠한 재미가 있다. 외계인 3인방 – 오공, 베지터, 피콜로 – 은 전혀 변함이 없는 반면 부인들은 빼도 박도 못하는 50대 중년이 된 걸 보면 같은 여자로서 몹시 안타깝다. 다음에 용신을 불러내면 젊게 해달라고 빌겠다는 부르마의 발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셀 전에서 등장했던 미래 트랭크스와 똑같이 자란 트랭크스와, 그토록 원하던 학자의 꿈을 이룬 오반의 모습은 흐뭇하다. 반면 오공과 똑같이 컸을 것을 기대했던 오천이 장발을 해버린 건 실망스럽다. 그리고 오공이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간절히 부정하고 싶다.
한편 그 옛날, 소녀 부르마가 꼬마 오공을 만나 모험을 시작하던 순간의 일러스트를 삽입한 페이지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안겨준다. 40년 가까이 이어진 주인공들의 일대기를 지켜봐 온 독자로서 뭉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오공 일행과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이 떠오르고, 아련한 그리움과 아쉬움 때문에 가슴이 찡해온다.
왜 새삼 드래곤 볼인가
원작 만화 기준으로 완결이 난 지 30년이 넘은 시간이 흐른 지금, 왜 새삼 드래곤 볼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수도 있겠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우선 드래곤 볼이 이미 만화 장르에서 고전의 지위에 올라 2020년대인 현재까지도 리메이크와 패러디, 극장판, 신작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변주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작품의 전성기였던 80~90년대와 한참 동떨어진 시기에 태어나 자라고 있는 요즘 아이 중에서도 드래곤 볼을 알고, 더 나아가 열광하는 친구들이 많다. 100년, 200년 전의 훌륭한 문학작품을 현대인이 읽고 리뷰하는 행위가 이상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이며 내밀한 이유로는, 아직도 드래곤 볼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심리를 들겠다.
초등학생 때 처음 드래곤 볼을 접한 후, 인생의 여러 전환기를 거치며 각 시기마다 세상이 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느라 만화 속 세상은 잊고 지낼 때도 많았다.
그러나 어느 때고 문득 생각이 나 만화책을 다시 들춰볼 때면 이미 수십 번을 반복해서 본 이야기인데도 어김없이 그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리고 부우 전에 이르러 긴 모험이 대단원에 다다르면, 매번 깊은 아쉬움과 슬픔이 찾아왔다. 아끼고 좋아하는 이야기가 끝나는 일이 못내 서운해,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만화책을 꺼내 보며 똑같은 전철을 밟는 일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러니 내가 드래곤 볼 얘기를 하는 것은 끝을 보고 싶지 않아서, 영원히 지속되는 이야기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동안 매거진에 담을 글을 하나하나 계획하고 써 나가면서 확인을 위해 혹은 아이디어를 얻고자 수시로 만화책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면서 바쁜 일상 속에서 망각하고 있었던 재미와 감동을 거듭 느낄 수 있었다. 에세이는 이 글로 종료되지만, 드래곤 볼은 이후에도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 끝 -
매거진 완결 후기 및 향후 계획
일전에 제가 앞으로의 글이 상당히 마이너해질 예정이니 양해를 구한다는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드래곤 볼은 앞서 얘기했듯 만화의 고전이자 광범위한 대중성을 득한 작품이지만, 브런치에서 논의하기에는 비주류인 주제이긴 했나 봅니다. 매거진을 이어가는 10주 넘는 기간 동안 구독자 수도, 조회수도 줄었거든요. 물론 저의 글이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면 이렇게 주제 탓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육아 이야기나 일상 에세이를 썼을 때보다는 확실히 반응이 덜했어요.
구독자 한 분 한 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냉정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시리즈를 계속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작가소개에서처럼 저의 브런치는 제가 열광하고 좋아해 왔던 콘텐츠를 다루는 곳이고, 거기서 드래곤 볼이 빠질 수는 없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브런치는 독자분이 제 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곳이기도 합니다. 브런치 활동을 꾸준히 하려면 제가 꼭 쓰고 싶은 글은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드래곤 볼 매거진의 거의 모든 글이 만화를 본 적 없는 분에겐 외계어나 다름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저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전에 ZARD에 관해 쓸 때는 그의 음악에 아무런 정보가 없는 독자를 상정했었는데, 이번 드래곤 볼 에세이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 점에 대해 구독자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아무런 부담 없이 지나치셨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쩌면 이 글들이 다 무플에 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 예상과 달리 댓글을 달아주신 작가님들이 계셔서 감격했습니다. 자드의 음악이 그러했듯, 드래곤 볼 역시 작품이 가진 불후의 명성과 재미 덕분이었겠죠.
그간 브런치를 통해 마음껏 드래곤 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댓글로 여러 작가님들과 소통한 것은 살면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대단히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려요. (_ _)
앞으로 몇 주, 혹은 몇 달간은 음악과 책에 관한 단편성 글을 여럿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읽어야 할 책이 잔뜩 쌓여있거든요. 서평을 써서 독자님들과 의견을 나누면 아주 즐거울 듯한 책들입니다.
구상하고 있는 새 매거진도 있는데요. 이번에는 상당한 자료조사와 공부가 필요한 기획이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려고 합니다. 제가 쓰는 글이 대부분 그렇듯 새 시리즈도 보편적인 주제는 아니지만 서브컬쳐적인 내용은 아니고요, 드래곤 볼처럼 배경지식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추후 올라올 새 매거진은 여유가 되신다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조심스럽게 부탁드려봅니다 :)
그럼 남은 연휴 동안 편안한 휴식 즐기시기를 바라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들러주시고 소통해주신 작가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