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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26. 2023

남서울터미널 앞 포장마차

30대 워킹맘의 파란만장 아이돌 덕질 13화

(커버 이미지 출처 : 크라우드픽)


콘서트의 막이 내리고 팬들은 귀가를 서둘렀다. 내가 통로로 나가기 위해서는 왼쪽 팬이 먼저 일어나야 했지만, 그녀는 챙길 것이 많은지 짐과 씨름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고. 신문물(?)을 잘 모르는 나에게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어 고마웠다고. 그리고 엔시티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 재밌었다고.     

무릎에 왕가방을 올리고 얘기할 타이밍을 모색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먼저 다리를 한껏 젖히며 말했다.


“먼저 나가셔도 돼요.”

아마도 내가 가방을 안고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는 것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나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같이 공연 봐서 재밌었어요.”

    

통로로 나가며 내가 건넨 말은 겨우 그 두 마디였다. 퇴장하는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묻혀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상태로 통행을 막고 있을 수도 없는 일, 그녀를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연락처를 물어보는 건 오버겠지만 트위터나 인스타 아이디라고 물어볼 걸 그랬나. 하지만 분명 그조차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웃고 즐기며 나의 콘서트를 더 재미있고 풍성하게 만들어준 옆자리의 시즈니.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엔시티를 좋아하고 있겠지?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지만, 난 아직도 가끔 그녀가 베푼 친절과 함께 나누었던 즐거운 대화를 떠올린다. 함께한 시간은 단 몇 시간에 불과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인연으로 남았다. 그녀가 언제 어디 있든 행복하기를.  

   

밖으로 나와 서울남부터미널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터미널에서 23시 45분에 출발하는 심야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갈 예정이었다. 도착하니 한 시간 좀 넘는 시간이 남았다. 문득 배가 출출해졌다.     


터미널 앞에는 포장마차가 진을 치고 있었다. 내가 포장마차에 가본 적이 있었던가.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소주 마시는 장면이야 물론 많이 봤지만, 직접 가본 기억은 없었다. 나는 포장마차에서 허기를 달래기로 마음먹고 손님이 가장 없는 점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웬걸.

“아이고, 어쩌나. 오늘 장사 끝났어요.”


벌써 끝났다고? 다른 점포를 더 가보았지만 모두 비슷한 시간에 영업을 종료하는 듯했다. 나는 떡볶이와 순대를 꼭 먹고 싶었다. 못 먹게 되니까 더 먹고 싶어지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손님이 많아 간신히 끼어서 먹어야 할 듯한 점포로 가보았다.    

 

다행히 그곳은 아직 영업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뜨내기 티를 팍팍 내며 사장님이 안내해준 구석 자리로 가서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왕가방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옆에 있던 여자 손님이 자기의 짐을 조금 밀면서 여기에 두라고 가리켰다.     


그런데 그 손님의 짐에서 나는 형광초록의 무언가를 보았다. 역시 그랬다. 믐뭔봄이었다. 그 손님 역시 시즈니였던 것이다. 그녀도 콘서트를 보고 이 남부터미널로 달려온 거겠지.

     

나는 내심 반가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열심히, 묵묵히 떡볶이와 순대를 입에 넣을 뿐이었다. 혼자 먹기엔 꽤 푸짐한 양을 앞에 두고 젓가락질을 쉬지 않는 그녀는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나는 떡볶이와 순대 1인분을 주문했다. 사장님이 바쁘게 앞 손님의 주문을 처리한 후 내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난 예전부터 왠지 모르게 분식집 사장님이 음식을 내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팔팔 끓는 떡볶이를 주걱으로 휘휘 저은 후 적당한 양을 투박한 그릇에 담고, 김이 풀풀 나는 솥에서 순대 한 줄을 꺼내어 나무 도마에 놓고 탁탁탁 썬다. 그 소리가 마치 ASMR 같다. 사장님이 하루에도 수백 번을 반복할 게 틀림없는 그 일사불란한 동작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꼭 어린 시절처럼 소꿉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떡볶이와 순대는 꽤 맛이 있었다. 내가 음식을 먹는 동안 손님들이 계속 들어오고 나갔다. 옆자리의 시즈니도 배가 부른지 음식값을 지불하고 갔다. 손님들은 모르는 사람 사이에 비좁게 끼어 앉으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게 포장마차의 매력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든든히 배를 채운 후 터미널 대합실로 들어섰다. 한쪽에 젊은 여자들이 둘러앉아 신나게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들의 짐에도 엔시티의 표식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도 동료(?) 시즈니를 이렇게 많이 만나다니, 외로울래야 외로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나처럼 이 심야버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열심히 잠을 잤다. 원래도 잘 시간이기도 했지만 하루의 피로가 몰려와서 그런지 불편한 자세로도 끊임없이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새벽 네 시가 넘은 시각, 버스는 울산시외버스터미널에 정차했다.     



14화 <덕질은 계속된다>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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