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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27. 2023

덕질은 계속된다

30대 워킹맘의 파란만장 아이돌 덕질 14화(완결)


집에 도착해 안방 문을 살짝 열어보니 남편과 아이가 새근새근 나란히 사이좋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쓰러졌다.

      

개운한 몸으로 누워 그날의 강행군을 돌이켜 보았더니 그 모든 일이 마치 전생의 일처럼 느껴졌다. 서울 중심부의 잠실주경기장에 있던 때와 지금 울산의 우리 집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일이 고작 몇 시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유튜브에는 팬들이 찍은 콘서트 영상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왔고 기사 사진도 떴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모습이 찍힌 것을 보고 내가 저 초록 불빛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혹시나 내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까 싶어 관중석 중 내 자리가 있던 쪽을 주시하기도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공연이 잔상이 가득한 채로 잠이 들었다. 지금쯤 대구 아가씨도 역시 서울 자취방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다음 날, 나는 새벽에 깬 남편을 붙잡고 따발총과 같은 속도로 서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넘어졌던 일, 맛있는 초밥, 시즈니들, 공연장 분위기 등 그날의 경험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얘기하다 보니 문득 같이 콘서트를 보러왔던 커플들처럼 남편과 함께 갔어도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는 만약에 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엔시티 콘서트도 같이 가줄 생각이 있어?”

남편은 두 눈을 티비에 고정하고 양손으로는 플스 패드를 붙잡고 14개에 달하는 버튼을 현란하게 조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이 정도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여보가 가자고 하면 나는 가지.”

순순히 나온 대답이 의외였던  나는 재차 물었다.

“네 시간 동안 남자 아이돌만 봐야 하는데도?”

“아, 맞네...”

“....”

그렇게 남편은 아맞네라는 세 음절의 대답만을 남기고 다시 플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가을밤의 꿈만 같던 콘서트가 끝난 후, 나는 정신없이 바쁜 워킹맘의 삶으로 돌아가 현실을 살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결코 엔시티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들의 음악을 듣고, 콘텐츠를 즐기는 건 이제 나에게는 생활의 일부였다. 그때 깨달았다. '남자가 마음이 있으면 화장실에서도 연락한다' 라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그런데 2023년 초반 엔시티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가 요란한 경영권 분쟁에 휩싸이면서, 팬덤 분위기가 크게 동요했다. 나는 하이브가 에스엠을 인수하든 카카오가 인수하든 상관없었지만, 새로운 경영진이 엔시티에 손을 댈까봐 걱정이 되었다.     


마음 편하게 덕질을 하지 못하게 된 데는 다른 요인도 있었다. 올해는 맏형인 태일을 필두로 엔시티의 군백기가 시작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홉 명의 완전체가 보여주던 보컬 그룹으로서의 환상적인 호흡을 한동안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몹시 슬펐다. 어쩌면 남동생이 군대 가던 날에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으면서, 태일이 군대 가는 날에는 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하원시키러 가다가 시간이 조금 이른 것 같아 아파트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곳은 노란색 통원버스들이 정차하기로 되어 있는 구역으로, 동네 태권도학원 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있는 벤치에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역시 태권도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오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아이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귓전에 꽂히는 너무나 낯익은 노래에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엔시티의 <질주>였다.     


어? 이상하다. 분명 내가 집을 나오기 전에 멜론을 껐는데. 나는 방금까지도 <질주>를 들었던 탓에, 조작 실수로 노래가 안 꺼진 줄 알고 황급히 스마트폰을 찾았다. 하지만 그건 내 폰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건 맞은편에 앉은 그 아이가 들고 보고 있는 유튜브에서 나온 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기껏해야 2학년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엔시티의 뮤직비디오를 보다니. 그들을 안다니.    

 

엔시티가 물론 아이돌이긴 해도 아주 어린 아이들보다는 10대 후반이나 20대에서 가장 인기가 많기에, 그 아이가 집중해서 뮤비를 보는 모습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반가웠다. 7년차라면 아이돌로서는 황혼기에 가까운 나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어린 팬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나는 어찌나 기뻤는지 그 아이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 아이가 1초만 더 그 자리에 있었어도 내 입에서 말이 튀어 나갔을 것이다.

‘얘, 너 혹시 엔시티 팬이니? 아줌마도 그런데.’     


하지만 마침 태권도학원 버스가 도착했고,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기 위해 떠나버렸다. 나는 내심 아쉬워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너도 정말 팬이라면 우리는 30년에 가까운 나이 차를 극복하고 동료가 될 수 있을 텐데.’     


나는 어쩌면 엔시티의 팬이었을지도 모를 그 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기억에 담으며, 나의 아이돌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 기분이 좋았다.




엔시티의 팬으로서 살아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들은 일찍이 알지 못한 음악과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수많은 코믹한 컨텐츠로 내 여가를 웃음으로 채워주었다.

“힘든 삶 속에서 활력소가 되어드리고 싶어요.”

언젠가 멤버들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듯이, 그들은 지난 시간 나에게 정말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    

  

이제 멤버들은 누구는 유닛으로, 누구는 솔로로, 또 누구는 배우로,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자리에서 활발히 활동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저마다 재능이 출중한 이 아홉 명의 청년들을 변함없이 응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앞으로도 엔시티127로서의 음악을 꾸준히 들려주는 것이다. 멤버들 모두가 군대에 다녀와 다시 완전체를 이루려면 수년에 걸친 시간이 흐른 뒤여야겠지만, 그때까지도 팀에 대한 자긍심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디 오래오래 노래 부르고 춤을 추길 바란다. 그것 말고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이 자리를 빌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준 엔시티 멤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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