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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26. 2023

멤버의 눈물에 대한 20대와 30대의 차이

30대 워킹맘의 파란만장 아이돌 덕질 12화


급속도로 쌀쌀해진 공기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나는 왕가방에서 기모 맨투맨을 꺼내 입었다. 그때, 너무나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엔시티127의 <낮잠>이었다. 왼쪽의 상냥한 그녀가 반색을 하며 내게 말했다.

“이제 곧 시작해요! 어제도 낮잠이 나오면서 시작했거든요.”

팬들이 일제히 떼창을 시작했고, 나와 대구 아가씨도 동참했다.     


기억해 이 순간의 우리 우리를
언제나 이렇게 together forever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노랫말을 열심히 따라부르는 동안 점점 흥분이 고조되었다. 다른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장 전체가 곧 등장할 우리의 아이돌에 대한 기대감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귓전을 강타하는 듯한 강렬한 <영웅>의 사운드가 울려 퍼지며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나는 얼른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아,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나의 앙증맞은 망원경이 감당하기엔 공연장이 너무 컸다. 아무리 줌을 최대로 당겨보아도, 멤버들의 이목구비는커녕 춤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듣는 콘서트로만 만족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경기장이 원래 공연을 위해 설계된 곳이 아니다 보니 음향이 좋지 않아 노래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엔시티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특별한 느낌이었다. 너무 멀어 저기 사람이 있다는 정도밖에 보이지 않아도, 그들이 내가 직접 보는 앞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기뻤다. 멤버들은 한 곡 한 곡 최선을 다했고, 신곡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공연하지 않았던 곡들도 보여주면서 멋진 무대를 꾸몄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바깥 하늘은 점차 어둑어둑해졌고 곧 밤이라고 할 만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 어둠 속에서 만 명에 달하는 팬들이 일제히 믐뭔봄을 흔드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사진 출처 : http://www.newsculture.press/news/articleView.html?idxno=512049

    

콘서트 분위기는 <흑백 영화>에서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날 밤에 느꼈던 낭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너와 날 물 들이는 Rain
회색에 젖을 때
널 그릴 때
우리 영화는 시작돼
비처럼 무채색이 돼
펼쳐질 장면에
가득한 건 오직 너와
하늘을 채운 Black Clouds  

   

차갑고 맑은 가을바람을 맞으며, 이 커다란 공연장에 오로지 엔시티의 노래만이 울려 퍼지고, 온 하늘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믐뭔봄만이 반짝이는 초록빛 물결을 이루는 가운데,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노래들을 나만큼이나 좋아하는 팬들과 함께 듣고 부르는 기분. 야외 콘서트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이 어떤지 모를 것이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과 뭉클함과 일체감이 마음속에서 마구 솟아나서 온몸을 휘감았다.


사진 출처 : http://www.newsculture.press/news/articleView.html?idxno=512049



참, 그런데 흑백영화를 부르기 전 일어난 일을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Dreams come true>를 부르고 있을 때, 갑자기 멤버 도영이 노래를 이어가지 못하고 마이크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그만 눈물을 보인 것이다.  

   

멤버들이 일제히 웃으며 도영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고 등을 안아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은 귀엽고 조금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번 콘서트에서 큰 감동을 받았구나. 이 순간을 행복해하고 팬에게 감사해하는 도영의 진심이 느껴졌다.   

  

눈물을 흘리는 도영과 그를 안아주는 리더 태용


그런데, 가까운 어느 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설마하는 생각으로 왼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진짜였다. 상냥한 대구 아가씨가 옷소매로 눈 주위를 훔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내 오른쪽에 앉아있던 좀더 어린 팬도 코를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아가씨들의 순수한 팬심에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엔시티를 향한 그들의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건 감정이 없어서라든가 팬심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난 이미 콘서트에서 울어본 전적이 있었다. 양쪽 팬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훌쩍거림을 들으며, 나는 6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남편이 티켓을 구해주었던 SES의 재결합 콘서트 날이었다. 나를 비롯한 팬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Believe In Love>라는 노래를 부를 때였다. 유진이 갑자기 마이크를 떨구더니 그만 얼굴을 두 손에 묻어버렸다. 감격을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룹이 해체된 지 13년, 이제 배우로서 활동한 기간이 아이돌로 있었던 기간보다도 길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SES를 잊지 않고 찾아와준 팬들을 보고 몹시 감격한 것이리라.      

그리고 아주 행복했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 다시금 SES의 노래로 팬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여전히 그들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다.

    

나는 어릴 적 우상이었던 언니의 눈물을 보고 따라서 눈물을 흘렸다. 10대 초중반, 그들은 좋은 음악으로 나에게 커다란 즐거움과 위안을 주었었다. SES의 주옥같은 노래들과 함께했던 내 인생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나는 드디어 언니들을 만났다는 생각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엔시티는, 내 기준에 엔시티는 너무 앞길이 창창한 팀이었다. 다들 아직 너무 젊고 전도유망한 청년들이고 여전히 보여줄 것이 많고 더 큰 인기와 명성을 누릴 기회가 가득하다. 그래서 유진의 눈물과 달리 도영의 눈물은 그저 기특하게, 흐뭇하게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멤버와 팬들을 울린 엔딩곡 <다시 만나는 날>이 끝나고, 콘서트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멤버들은 막이 닫히는 순간까지 손을 흔들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무대는 언제 아홉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 있었나 싶게 허전했다. 네 시간에 달한 음악제의 여운은 길고도 길었다. 손에 든 불 꺼진 믐뭔봄이 이제 꿈에서 깨 현실로 돌아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연히 고개를 들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 밤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라고.  


   

- 13화 <남서울터미널 앞 포장마차>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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