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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24. 2023

옆자리 친절한 그녀와 앞자리 용감한 그

30대 워킹맘의 파란만장 아이돌 덕질 11화


게이트 앞에 서니 진행요원이 몇 가지 물건을 건네주었다. 슬로건, 이벤트용 비행기 접기 종이, 그리고... 이건 뭐지? 세로 방향으로 몇 번이나 접혀있는 빳빳하고 길쭉한 종이가 있었다. 나는 그것의 용도를 모른 채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은 과연 그 위용이 대단했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타원과 사방을 빽빽이 둘러싼 셀 수없이 많은 좌석을 보고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검색해보니 공식적인 수용인원이 무려 10만 명이었다. 10만 명! 물론 콘서트 같은 공연은 무대를 바라보는 쪽의 좌석만 사용할 테지만 그래도 최소 1만 명은 넘는 팬들이 오늘 이곳에 가득 찰 것이다.      


내 자리는 출입구로 나가는 계단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통로에서 들어와 두 번째 좌석이었는데, 첫 번째 자리, 즉 내 왼쪽에는 이미 주인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주섬주섬 자리를 잡고 앉아 통행에 방해가 되는 왕가방을 내 좌석 밑에 눕혔다. 그리고는 경기장 곳곳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왼쪽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어제도 오셨어요?”

응? 나한테 묻는 건가? 그때 우리 주위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으니 나한테 하는 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아니요, 어제는 못 왔어요. 혹시 오셨었어요?”

나는 옆자리의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그날이 콘서트 두 번째 날이었으므로, 어제 왔냐는 말은 첫 번째 공연도 봤냐는 말이다.

“네. 저는 왔었어요.”

헉. 이분 대단한 팬이네. 같은 공연을 양일간 두 번 본다는 건 보통 팬심이 아니고는 힘든데. 내가 감탄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는 3층이었는데, 2층에 오니 느낌이 확 다르네요. 훨씬 잘 보여요.”

“그래요? 저는 2층도 멀다는 생각이었거든요. 3층과는 비교가 안 되나 보죠?”

“그럼요. 3층은 사실 그냥 분위기 즐기러 가는 거죠. 그래도 제일 높은 곳이라서 분위기는 정말 좋았어요.”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상냥한 목소리와 긴 머리칼, 단정한 옷차림새를 보아 상당히 예쁜 아가씨일 것 같았다. 나는 그녀도 혼자 온 것인지 궁금해 물어보았다.

“혼자 오신 거에요?”

“네... 같이 가자고 할 사람이 없어서요.”

“저도 그래요. 주변에 딱히 아이돌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세요? 저는 원래 언니가 저보다 더 팬이었거든요. 근데 결혼하고 얼마 전 임신까지 하게 돼서 못 왔어요.”     


그렇게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혼자라서 딱히 외로웠던 건 아니지만, 낯선 사람인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호의가 고마웠다. 대화하면서 알게 된 그녀는 20대 후반으로, 고향은 대구이지만 직장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 자취 중이었다.     


“저기... 그런데 혹시 이게 뭔 줄 아세요?”

나는 아까 입구에서 받았던 정체 모를 종이를 꺼내며 물었다. 

“아, 그건 박수치는 거에요. 이렇게 접었다 폈다 하면 소리가 나거든요.”

그녀가 내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양쪽을 손으로 잡고 접었다 폈다 하니 짝짝 하면서 종이가 구겨졌다 펴지는 소리가 마치 박수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 그런 거에요? 전 또 부채인 줄 알았네요...”


요즘 공연장에서는 이런 것도 나눠주는구나. 케이팝 공연에 대한 나의 무지가 드러났지만, 옆자리의 그녀는 조금도 비웃는 기색 없이 나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응원봉은 사셨어요?”

나는 어렵게 구한 믐뭔봄에 대한 질문이 반가워, 그 녀석을 꺼내서 보여주며 대답했다.

“네. 오늘 샀어요. 다행히 남아있더라고요.”

“그럼 블루투스 연동도 하셨어요?”

“?”

블루투스 연동? 그건 또 뭐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녀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주최 측에서 노래와 분위기에 맞게 불빛 색깔을 바꿔줘요. 빨간색도 되고, 연두색도 되고, 그냥 꺼질 때도 있구요. 반짝이는 횟수도 알아서 바꿔줘요. 내 믐뭔봄도 거기에 맞출려면 미리 연동을 시켜놔야 해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정말요? 라고 되물을 뿐이었다. 상냥한 팬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다 빨간색 불빛인데 나만 다른 색깔이고 그러면 아무래도 좀 뻘쭘하게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조금 번거로워도 해두시는 게 좋을 거에요.”

“그렇군요.. 그치만 어떻게 하는 지를 모르는데...”

“혹시 에스엠 타운 앱 깔아두셨어요? 일단 거기에 들어가 보세요.”


폰을 꺼내 들고 더듬더듬 앱을 찾는 내 옆에서 친절한 그녀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방법을 알려주었다. 무슨 놈의 앱 종류도 그렇게 많은지 새 것을 다운받아야 했다. 그리고 물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는 작업도 빠질 수 없었다. 


나는 매우 귀찮긴 했지만 아가씨 팬의 도움을 받아 믐뭔봄을 블루투스 연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직도 옛날 90년대 시절 팬 문화만 기억하고 있던 내게 이런 기술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그야말로 신문화기술(Neo Culture Technology) 그 자체였다. 나는 옆자리 아가씨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관중석이 온통 빨간 물결이 되었을 때 혼자 산뜻한 초록색 섬이 될 뻔 했다.


그녀와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문제는 내가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전날 밤 밤을 새우다시피 한 데다 평소보다 너무 많이 걸었고, 또 넘어지기까지 하면서 내 체력은 바닥이 나 있었다. 왼쪽 무릎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끊김 없이, 어색함 없이 대화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 사이에는 가끔 정적이 찾아왔고, 또 어떤 얘기를 꺼낼까 고민하던 중 앞자리에 누군가 들어와 앉는 것이 보였다. 그는 청바지를 입고 회색 후드를 머리에 눌러쓰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였다!     


아마 엔시티 팬의 99.5프로는 여자일 것이다. 그런데 남자팬이 등장하다니. 나는 깜짝 놀라서 옆자리에 대고 속삭였다.

“아니, 남자팬이 있네요? 그것도 혼자 온 것 같은데요?”

“와, 그렇네요. 팬미팅이나 공연을 다녀 보면 은근히 남자분들이 보이긴 했었는데, 주로 커플끼리 온 경우가 많았어요. 혼자 온 사람은 저도 처음 봐요.”     


남자가 남자 아이돌 콘서트 보러 오기 쉽지 않은데. 어디 초대권이라도 받아서 온 건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용자는 심지어 믐뭔봄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기하면서도 엔시티에 대한 자부심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혼자 콘서트까지 즐기러 오는 동성 팬이 있다는 건 그만큼 음악 자체로도 경쟁력이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또 놀라웠던 건 나보다도 더 연배가 높아 보이는 아줌마 팬들도 꽤 보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분은 딸과 같이 온 것 같았는데, ‘이마크’라고 멤버의 이름이 커다랗게 적힌 슬로건까지 들고 있었다. 정작 딸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분을 보고 솟아오르는 동지애와 안도감을 느꼈다. 달려가서 언니, 언니도 마크 좋아해요? 하면서 손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섯 시가 다가올수록 그 커다란 경기장의 한쪽 면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라운드에는 복받은 신의 손의 소유자들이 플로어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고개를 돌려보면 3층에도 많은 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10월의 하늘은 금새 어두워졌고 공기는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12화 <멤버의 눈물에 대한 20대와 30대의 차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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