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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22. 2023

응원봉 사려다 겪은 시련

10화


나는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믐뭔봄 판매 부스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보조경기장도 너무 커서 입구부터 부스까지 상당히 멀었고, 정말 오랜만에 일거리를 얻은 내 다리근육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로지 콘서트를 훨씬 잘 즐기게 해줄 저 형광연두색 요술봉을 위해서 나는 전속력으로 뛰었다.     


고지가 3분의 1 정도 남았을 때,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몸이 어디엔가 붙들린 듯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뒤에 누가 있어 나를 잡아당긴 줄 알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착각이었다). 한 0.5초 정도 누구인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나는 상체가 급격한 경사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땅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꽥!!!”


외마디 비명과 함께 왕가방이 내 숙여진 머리 위로 솟구쳤다. 곧 그것은 서울올림픽경기장 보조경기장에 대자로 뻗은 35세의 박세온의 등에 퍽 소리를 내며 안착했다.


그렇다. 나는 넘어진 것이다. 아니, 내동댕이쳐졌다. 그것도 엄청난 스케일로.


아, 독자들이여. 이건 절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백 퍼센트 실화다. 하필 그 넓은 곳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보란 듯이 넘어져 버린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굴욕감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날의 창피함은 내가 인생 살면서 겪은 모든 쪽팔렸던 상황을 다 통틀어도 일등이었다.


곧바로 땅을 박차고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아프기도 꽤나 아팠다. 한동안 나동그라진 채로 신음을 내뱉던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감안해 주위에 보이는 많은 신발들이 내 쪽으로 다가와 줄 줄 알았다. 걱정이 담긴 상냥한 목소리로“괜찮으세요?” 라고 물으면서.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야속하게도 어느 누구도 내게 와주지 않았다. 차라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모습이 가려지면 덜 창피하련만,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설 때까지도 나는 혼자였다. 운 좋게 아무도 나를 못 본 건지, 아니면 보고도 웃느라 정신없어서 도와주지도 못한 건지 궁금했지만, 그걸 확인하러 사람들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다.


무릎은 따갑고, 묶었던 머리는 풀어지고, 온몸이 욱신욱신한 채로 나는 터덜터덜 다시 부스 방향으로 걸어갔다. 잔뜩 멋을 부린 팬이 나를 봤다면 같은 엔시티 팬이라고 인정하기 싫어할 것 같은 몰골이었다.


겨우겨우 믐뭔봄 사는 줄을 찾아 맨 끝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데, 내 창피함에 기름을 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땅을 잘 보고 걸으세요! 발밑 조심하세요!”

진행요원이 확성기를 들고 커다랗게 안내방송을 하는 게 아닌가. 분명 내가 눈썹을 휘날리면서 달려올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진행요원이 내가 넘어지는 걸 본 게 틀림없었다. 악!


나는 창피함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내방송은 내가 믐뭔봄을 사서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진행요원들은 한술 더 떠서 어디선가 공구를 가지고 오더니 바닥을 보수하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그제서야 나는 내 발이 어디에 걸린 것인지 알게 되었다.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깔아둔 보양재의 모서리가 곳곳에 들떠 있었는데, 거기에 딱 걸리고 만 것이었다.


이 사람들이, 그런 위험 요소는 진작에 보수했어야지. 꼭 나 같은 무고한 소가 나와야 외양간을 고친단 말이야? 진행요원들이 내가 넘어지는 장면을 봤을 것 같아 느끼는 창피함과, 안전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주최 측에 대한 불만이 마음속에서 마구 뒤엉켰다.




그리고 마침내, 고난과 시련을 겪은 끝에, 나는 드디어 믐뭔봄을 손에 넣었다. 다행히 품절이 되기 전이었다. 내가 이거 하나 사려고 그 굴욕을 당하다니. 손에 든 그 네모난 물건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다.


이것이 내가 고생해서 산 그 믐뭔봄이라는 녀석이다.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면서 믐뭔봄을 이리저리 조작해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버튼을 눌러보니 켜지긴 잘 켜졌다. 그런데 이 녀석은 도무지 꺼질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


버튼을 길게 꾹 누르고 있어야 하나? 마우스 더블클릭을 하듯이 두 번 연속 버튼을 눌러야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을 다 시도해보았지만 믐뭔봄의 번쩍거리는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케이스를 열어 설명서를 찾아보았으나, 설명서조차 없었다. 내면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아니, 이 에스엠이라는 작자들은 설명서 없이 어떻게 조작법을 배우라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인터넷을 검색해봤는데, 설명서가 통 안의 숨겨진 공간에 들어있다고 했다. 보호재로 들어있는 스티로폼을 들어내면 그 밑에 들어있다는 거였다. 얼른 걸음을 멈추고 통을 열어 스티로폼을 꺼내 보니, 고작 포카보다 조금 클 것 같은 설명서가 떡하니 앉아있었다. 하아.. 그 조그만 것이 그것도 몰랐냐는 듯 나를 비웃고 있었다.


끄는 방법은 별것도 아니었다. 버튼을 ‘네 번’ 누르면 꺼지는 거였다. 두 번도, 세 번도 아니라 네 번. 그 숫자를 맞추지 못해 나는 또 헤맨 것이다. 콘서트 한 번 보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마음속으로 푸념했다.



점심은 내가 전날 미리 검색해둔 초밥집에 가서 먹기로 했는데, 종합운동장 역에서 두 정거장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배도 너무 고프고 다리도 너무 아프고 온 삭신이 쑤셨던 나는 도저히 다시 지하철을 타러 그 먼 길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과감히 택시를 탔다.


얼마 후 마주한 초밥세트의 때깔은 그날 오전 나의 고생을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큼 번지르르했다. 오랜 시간을 곯은 나의 배는 기본 12개가 나오는 초밥 세트에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단품 초밥을 추가로 한 10개는 시켰던 것 같다.      


맨 아래에 있는 노란색 길다란 것이 왕새우꼬리 초밥이다.


역시 서울이라 그런지 울산에서는 본 적 없는 종류의 초밥도 있었는데, 이름이 왕새우꼬리 초밥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특히 너무 맛있어서, 딱 하나만 더 시킬까 하다가 참았다. 너무 배가 불러도 콘서트 보는 데 방해가 된다. 아이고, 엔시티 애들아. 너네는 당연히 모르겠지. 한 지방 사는 나이든 누나가 니네 라이브 한번 들으려고 이렇게 애쓰고 있는 것을.     




든든히 배를 채운 나는 다시 잠실로 돌아갈 때는 소화도 시킬 겸 지하철을 탔다. 아까 봤던 서울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잡지 않고 여유롭게 서서 가고 싶어, 두 손으로 폰을 들었다. 열차가 정차할 때 또 넘어질 뻔했다. 나는 여유 따위 포기하고 얌전히 머리 위 고리에 한 손을 끼웠다.     


그 와중에 믐뭔봄 녀석은 새것이어서 그런지 어찌나 감도가 좋은지, 내가 약간만 움직여도 버튼이 반응해 불빛이 들어왔다. 나는 열차 안에서도, 역사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싶어 하는 녀석을 황급히 진정시켜야 했다.     


이토록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세시 반이 되었다. 공연 시작은 6시였지만 미리 화장실도 다녀와야 하고, 사람들에게 너무 치이지 않게 여유롭게 입장하고 싶었다. 소중히 모셔온 티켓을 손에 들고 나는 2층 36구역 10열 030번과 가장 가까운 게이트를 향해 출발했다.    

 

11화 <옆자리의 친절한 팬과 앞자리의 용감한 팬>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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