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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20. 2023

나를 당황시킨 집배원 아저씨의 말

8화


D-day 전날 밤. 나는 긴장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커피를 마셨어도 졸음이 카페인을 이기고도 남을 터인데, 그날은 예외였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콘서트를 생각하면 침대에 아무리 뻗어 있어도 정신이 말똥했다. 결국 새벽 네 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기차 출발이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몇 서너 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일어나 간단히 준비를 마친 나는 남편과 아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나 없이는 밤에 잠을 자려 하지 않는 아이에게, 아빠와 먼저 자고 있으면 엄마가 한밤중에 옆에 와서 같이 누울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는 왕가방을 둘러메고 마치 전쟁터에 나서는 병사처럼 비장하게 집을 나섰다.    

  



휴일 아침은 고요하고 상쾌했다. 이 좋은 시간에 혼자 집을 나와본 게 얼마만 인가 싶었다. 하늘은 높고 맑아 비가 올 기미조차 없어, 날씨의 신조차 나의 잠실 입성을 축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택시를 타고 시청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또 5001번 리무진을 타고 울산역으로 향했다. 다른 도시와 달리 울산역은 시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리무진을 타도 30분 정도는 걸리는 거리다. 차창 너머로 펼쳐진 태화강 대숲을 바라보며 나는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시댁에서 온 전화였다.    

 

나는 남편과 아이를 두고 혼자 놀러간다는 말을 하기가 좀 민망했지만, 숨김없이 말씀드렸다. 다행히 시부모님은 서울까지 간다는 데 좀 놀라실 뿐, 그다지 못마땅한 기색은 아니었다. 

“누가 또래 아니랄까봐, 우리 다혜랑 똑같네.”


다혜는 우리 아가씨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아가씨와 나는 상호 존대를 한다. 남편에게 듣기로 아가씨는 소싯적 빅뱅 팬으로 한가닥했다고 하는데, 역시 선배로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언니 보조배터리는 있어요? 거기 엄청 추울 건데 옷은요? 티켓도 잘 챙겼죠?”     


티켓. 그렇다. 나는 예매 시 티켓을 우편으로 받기로 신청해두었으므로 며칠 전 집으로 실물 티켓이 배달되었다. 여기서 잠시 그때의 일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언제나처럼 남편과 아이와 어지럽게 놀고 있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누가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지 궁금해하며 나가보니, 집배원 아저씨가 서 있었다.      

아저씨는 내가 문을 열자마자 대뜸, 

“박세온 모친?”

하고 물었다.

모친이라는 단어에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박세온인데요.”

아저씨는 순간 나만큼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내 얼굴과 티켓을 번갈아서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이거 애들 보는 공연인데? 박세온 모친 아니에요?”

나는 그제서야 그분이 혼란스러워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본인이에요. 제가 보는 거에요.”

내가 재차 확인시켜주었지만, 아저씨는 끝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인을 받아 갔다.     


나는 집배원 아저씨의 착각이 재미있어서 키득대다가, 문득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우리 집 대문 밖에 놓인 유모차와 세발자전거, 유아용 킥보드 중 무엇이 아저씨로 하여금 세온이가 콘서트를 보고 싶어 할 만큼 큰 아이로 생각하게 만든 것인지 고민했다. 삼십초 간의 고심 끝에 내가 얻은 답은 눈썹 문신이라도 예약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리무진은 순조롭게 달려 울산역에 도착했다. 요기를 해도 될 만큼 시간이 충분했지만 긴장이 되어 아무것도 먹기 싫었다. 친숙한 플랫폼에서 몇십분 동안 기다린 끝에 내가 타야 할 SRT가 굉음을 내며 들어왔다.    


곧 기차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지만, 왕가방의 덩치를 감당하기에는 좌석이 예상보다 많이 좁았다. 하지만 창측 자리에 있던 나는 굳이 힘겹게 복도로 나가 저 위에 위치한 짐칸에 그것을 올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키 작고 팔도 짧은 나인데 저 거대한 몸집을 들어 올리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그것이 평화롭게 앉아있던 한 승객의 머리 위에 착지하는 상태라도 벌어진다면 어떤 소동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결국 나는 불편하더라도 그것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기로 했는데, 거의 내 앉은키와 맞먹을 지경이었다.     

나는 요리조리 몸을 움직여 간신히 공간을 마련한 후 준비해온 책을 꺼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야심차게 구입한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도 무색하게, 나는 얼마 안 가 왕가방에 턱을 괴고 태평스럽게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역시 교양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 시간 가량 꿀잠을 즐기고 나니 안내 방송이 나왔다. 종착역은 수서역, 수서역. 나는 피로곰이 업힌 것처럼 무겁고 나른한 몸을 일으켜 플랫폼에 내렸다. 드디어 약속의 땅, 서울에 도착한 것이다. 

    

서울에서의 내 첫 번째 미션은 역시 믐뭔봄을 사는 것이었다. 나는 잠실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9화 <드디어 잠실 입성>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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