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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엄마HD아들 Sep 17. 2023

임신 18주 구급차를 타다

기적은 있다


"자궁문이 열려서 양막이 빠져나왔습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 우리 병원에서 수술을 할 수는 있지만, 너무 어려운 수술이라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 첫째, 그리고 뱃속에 있는 둘째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원인 모를 하혈로 급히 병원을 찾았고, 자궁경부가 짧아져서 위험하니 입원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도 엄마와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첫째와 정신없는 이별을 하고, 여성병원에 입원한 지 1주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궁문이 열리고 양막이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 소리는 곧 아기가 세상밖으로 나온다는 소리였다.



나는 멍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지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도 않았다. 의사의 말에 슬픈 표정을 짓고 눈물을 보이긴 했지만, 슬프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었기에 그랬을 뿐이다. 그 순간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거짓말. 아직 5개월 밖에 안 됐는데 아기가 태어난다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이리도 차분할 수가 있지? 엉엉 울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울지 않았다. 원래 나는 걱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다. 예민하고 감수성도 풍부하다. 때때로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순식간에 변한다.


그런 내가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이렇게 감정조절을 잘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서 현실감각이 없어서, 내 일 같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까?


 

모성애였다.


18주 동안 품고 있었던 아이가 500g도 안된 채 세상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듣고도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단 한 번도 아이가 잘 못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이유. 마음이 요동치지 않았던 이유.


나는 본능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였고, 놀라울 만큼 이성적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뱃속에서 놀고 있을 아이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전달받는 아이에게 불안과 슬픔을 줄 수 없었다.



'아가야 괜찮아, 별일 아니야. 코 자고 있으렴'








병원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달려온 남편이 말했다.


"서울로 가자. 서울에 수술을 잘하는 교수님이 계시는데, 여기 병원에서도 그 교수님께 가는 게 좋겠다고 했어"


남편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다. 평소 찔러도 피한방을 안 나올 것 같다고 생각될 만큼 감정 표현이 적은 사람이다. 그래서 서운한 적이 많았지만 이렇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



아이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한시라도 빨리 인천에서 수술을 할지, 서울로 달려갈지 결정을 해야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나는 아이를 믿었다. 잘 버텨 줄 것이라고. 꼭 잘 버텨서 건강하게 태어 날 것이라고.







2018년 5월 21일 밤.

나는 구급차를 타고 인천에서 서울로 향했다.  난생처음 구급차를 타는 게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니.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호흡이 가빠졌다. 같이 동승한 간호사선생님은 종이로 계속 부채질을 해주셨다. 그 작은 바람이 나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고위험 산모들이 찾는 유명한 곳. 내가 이곳에 올 줄이야.


부축을 받으며 구급차에서 내린 나는 휠체어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촤악-



문이 열리고 드라마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눈부시게 밝은 조명 아래 빠르게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 그 틈으로 보이는 응급환자들.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첫째를 데리고 응급실에 여러 번 갔었지만, 휠체어에 앉아서 보는 풍경은 의학드라마를 연상케 했으며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마치 거대한 세트장 같았다.


구급차를 타고 날아왔음에도 현실감각이 없었다. '여긴 어디, 난 누구?'라는 생각이 뱅글뱅글 돌았고, 주변  소음은 마치 물속에 있는 듯 웅웅 거릴 뿐,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음파를 보자는 의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 누웠고, 초음파 화면을 응시했다.



"양막이 빠져나왔다고 들으셨죠? 아기 발이 빠져나와있어서 다시 넣고 자궁경부를 묶는 수술을 해야 해요"



아찔했다. 발이 빠져나왔다니. 구급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아이는 조금씩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 아기가 하품하네요. 보셨어요?"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째 호야는 천하태평하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잘 놀고 있어서. 편안해 보여서.







나는 바로 고위험산모들이 있는 병실로 올라갔다. 누워만 있어야 하기에 소변줄을 달고 자궁수축억제제를 맞았다. 수술을 맡아 줄 교수님이 계시지 않았고, 다음날 세미나 일정이 있으셔서 언제 수술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버틸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처럼 자궁문이 열려 수술을 하고 나서도 몇 달씩 입원해 있는 엄마들이 있었기에 우리 호야도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5월 22일 석가탄신일.


담당 교수님께서 나의 간절함을 아셨는지 세미나에 가시기 전, 동이 트기도 전에 병원으로 오셨다. 기적 같았다.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았다.


마취주사를 맞는 순간 나를 옥죄고 있던 긴장에서 벗어났고, 나는 수술대 위에서 눈을 감았다.









마취에서 깨어 힘겹게 눈을 뜨니 아무도 없는 회복실이었다. 너무 추웠다. 나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을 건넸다.


"우리 호야 잘 있지? 엄마 뱃속에 있는 거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태동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살아있구나, 지켜냈구나.


5개월이 넘도록 계속되는 입덧과 함께 첫째도 돌보아야 하는 지옥 같았던 임신기간이었기에 출산을 하는 날만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래서였을까?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 나의 스트레스와 고통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일까?


너무나 미안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모여준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일주일간 자궁수축억제제를 맞으며 경과를 지켜보아야 했다. 소변줄을 달고 160시간 가까이 누워만 있었다.  


끝나지 않은 입덧에 먹지도 못하고 다 토해냈다. 밤낮 없는 간호사들의 케어와 약 부작용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쓰이지 못한 근육들은 서서히 빠져나갔다.



큰 고비를 넘기자 집에 두고 온 첫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엄마 아빠도 없이 할머니댁에서 보내는 2주 동안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을까.


병실 천장만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누워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졌고, 그럴 때마다 뱃속에 둘째는 '나 잘 있어요' 하며 통통 움직였다.


이 아이를 만삭 때까지 지킬 수 있을까? 불안했지만 언제까지 병원에 있을 수는 없었다. 먼저 태어난 내 새끼도 지켜야 하기에.



나는 자궁수축억제제를 맞지 않아도 안정적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퇴원을 했다.



하지만 퇴원을 한 뒤에도 바로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수술을 했지만 언제 또 응급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최대한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결국 퇴원하자마자 첫째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서 한 달을 보냈다. 첫째는 엄마가 없는 동안 많이 불안했는지 퇴행행동을 보였고, 그런 첫째를 보며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졌다.



혼자는 너무 외로우니 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이 잘 못된 것이었을까. 이기적이었던 것일까. 첫째가 동생을 원한 것도 아니었고, 둘째 아이는 첫째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으면서 나의 욕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 것 같아 너무 괴로웠다. 모든 게 다 내 탓 같았다.








친정에 있는 한 달 동안 나는 두 돌 밖에 안된 첫째가 다닐 어린이집을 알아보았고, 첫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린이집에 가야 했다. 둘째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살얼음판 같은 임신기간을 보내면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갔다. 그리고 첫째아이의 세상은 지진이 난 듯 모든 게 무너졌다. 어린이집에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아파서 두 달을 힘들어했다. 몸이 나은 뒤에도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아이는 예민해졌고, 자주 분노했고, 불안해했다.


첫째에게 미안한 마음에 둘째가 힘들게 버텨주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다시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뱃속에 있는 둘째도 중요했지만 눈앞에 있는 마음이 아픈 첫째도 지켜야 했다.








34주, 며칠간 진통이 계속되었고 양수가 터지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임신기간이 막을 내렸다.




2018.9월 15일 10시 1분 둘째가 세상밖으로 나왔다.


조산이라 무통주사도 맞을 수 없다는 말에 멘탈이 흔들렸지만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끝난다는 생각에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고통은 잠시, 둘째가 태어나고 걱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간호사품에 안겨 집중치료실로 가는 둘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난 왜 이리 복이 없을까. 첫째도 둘째도 얼굴도 못 본 로 집중치료실에 보내다니. 둘 다 자연분만을 하고도 한 번도 아이를 안아보지 못한 것이 너무 한탄스러웠다.



둘째는 신생아중환자실(NICU)에 들어갔고,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2주 동안 유축한 모유를 인천에서 서울로 나르느라 산후조리는 꿈도 못 꾸었다. 오로지 아이들 생각뿐이었다.



2주가 지나 둘째를 안고 집에 돌아올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갑상선기능저하증으로 호르몬약을 먹어야 하고, 뇌출혈 흔적이 있어 외래진료를 다니며 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에 며칠을 울었지만,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2023년 9월 15일 5번째 생일을 맞이하다.


뱃속에 있는 내내 엄마를 환장하게 만들었던 둘째의 5번째 생일이 되었다.



매년 9월 15일, 아이를 지킬 수 있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구급차에서 나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던 마음이 예쁜 간호사선생님, 안전하고 빠르게 병원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준 구급대원 분들, 둘째에게 새 생명을 주신 '이근영'교수님, 그리고 수많은 의료진분들,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세 사람에게 감사를 전한다.



동생을 지킬 수 있게 긴긴 시간을 버텨준 사랑하는 나의 첫 번째 아가야, 네가 있었기에 엄마는 그 힘든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단다. 엄마, 아빠가 없는 시간 동안 울지 않고 잘 기다려 주어서, 태어나서 가장 미웠을 동생이란 존재를 받아들여 주어서, 멋진 형이 되어 장난꾸러기 동생을 항상 지켜주어서, 내 첫 번째 아가가 되어주어서 고마워.



사랑하는 나의 두 번째 아가야, 힘든 시간 잘 버텨내고 건강하게 태어나 주어서 고마워. 늘 형을 먼저 챙기는 엄마가 야속할 텐데도 엄마 기분을, 엄마 마음을 가장 먼저 챙겨주는 너는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야. 너를 만나고 기적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어. 가끔 네가 기적처럼 우리에게 와준 소중한 아이라는 것을 잊고 혼낼 때도 있지만, 우린 너를 사랑해, 항상 감사해.


그리고 사랑하는 내 남편, 힘든 시간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늘 잔소리만 늘어놓지만, 많이 사랑해. 당신과 함께했기에 8년 동안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었어. 이제 곧 이사도 가는데 우리 더 행복하게 잘 살자.







그리고....







셋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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