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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Feb 05. 2024

울퉁불퉁한 사랑

<구의 증명>을 읽고 떠오른 나의 지독한 사랑

오늘 아침, 최진영 작가의 소설 <구의 증명>을 읽었다. 읽는 이를 점점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깊고 고요한 이야기였는데, 생뚱맞게도 나는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이런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읽고 떠오른 이가 남편이라니. 어딘가 좀 허탈하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형이랑 누나는 사귀는 거 맞지? 노마가 물었다. 구와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우리는 사귄다는 단어를 채우고도 그 단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넘쳐흐르는 관계였다. p.76


지금으로서는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 그랬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그럴 때가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에 나의 커다란 마음을 담을 수 없어 조바심이 나던 때가 분명 있었다. ‘사귄다는 단어를 채우고도 그 단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넘쳐흐르는 관계’,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아니까 먹먹한 감동이 진하게 밀려왔는데, 내가 그런 관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아니, 내가 안다고? 진짜? 내가 그런 사랑을 했다고? 진짜?)


내가 이 남자를 이렇게나 사랑했다는 게 갑자기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쓸데없이 분한 마음까지 들려던 차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구의 증명> 마지막에 쓰인 ’작가의 말‘을 읽고 9와 숫자들의 ’창세기‘를 반복해서 듣고 있는데, 오랜만에 송재경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우리의 결혼식 축가가 기억이 나서 또 한번 헛웃음이 났다. 기타 연주가 취미이자 특기였던 그가 기타를 치며 9와 숫자들의 ’그대만 보였네‘를 축가로 불러주었다. ’별로 예쁘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만 내 눈에는 그대만 보였네 거대한 인파 속에서’ 너무나 낭만적인 노래인 거 맞는데, 결혼식을 위해 한껏 멋을 부린 신부에게 ‘별로 예쁘지도 않다’는 건 좀 그렇지 않니? 그래서 친히 개사까지 해주었더니만 한껏 긴장한 그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는 그런 이야기. (또르르르르…)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남은 건, 우리의 인연도 벌써 10년이 넘었다는 사실. 오늘처럼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그가 어처구니없지만, 그게 다 함께 한 세월 덕이라 생각하니 미워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10년 전에는 사랑한다는 말에 나의 커다란 마음을 다 담을 수가 없어 억울했다면, 이제는 이렇게 울퉁불퉁한 마음도 사랑이라는 말에 담을 수 있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사랑의 모양이 많이 바뀌었다.


<구의 증명>에서 구와 담이는 둘 사이에 어떤 액체가 한 방울 톡 떨어져서 퍼즐이 착 하고 맞춰지는 것처럼 둘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하던데, 남편과 나는 여기서 툭 저기서 툭 이리저리 치여서 상처가 가득한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하나가 되어 신나게 데굴데굴 굴러가는 관계인 것 같다. 어차피 혼자 굴러가도 상처 투성이일 텐데, 함께 손 잡고 굴러 줄 사람이 옆에 있으니 조금 든든한 거 같기도 하고. 앞으로 10년 뒤 사랑의 모양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쨌거나 구와 담이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읽고 불쑥불쑥 떠오르던 이가 남편인 걸 보니까, 그가 나의 사랑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 더 열심히 지.. 독… 하게…. 사랑해 줘야지. 지.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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