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알아가는 것과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는 것
1.
"우주는 우리의 눈을 통해 자신을 인지한다"―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천문학 수업에서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이다. 우리는 우주의 장엄함을 일깨워주는 관찰자들이다. 관찰자가 없다면 우주도, 현상도, 존재도 없다.
2.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만나고 알아간다. 첫 만남일 수도, 오랜만에 하는 재회일 수도, 매일 보는 익숙한 만남일 수도 있다. 여하튼 알아가는 과정은 상대에 관한 사실과 특징을 자신의 뇌에 입력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에 관한 정보를 다름 아닌 본인의 뇌에 새기는 것이기에, 주관이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찰자로서, 우리의 주관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에 대한 정보를 왜곡한다.
3.
인류가 우주의 관찰자라면 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바뀌었을까? 모든 관점을 참고하기에는 인류의 역사가 너무 길기에, 현대 과학에 영향을 주었던 시기부터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이를 둘러싸고 태양과 달, 행성과 별들, 그리고 그 너머에 천국이 존재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우리의 육안에만 의존해서 본다면 지구가 중심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듯싶다. 이 관점은 16세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관측 기술이 좋아지면서 지구를 중심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는 행성들이 거꾸로 움직이는 겉보기 역행 운동이 관측되었다. 프톨레미적 우주관은 이 현상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다. 이를 본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을 태양으로 설정하면 행성의 역행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에 등장한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가 완벽한 원이 아닌 타원임을 밝혀냈고,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며 지구에만 위성이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뉴턴은 행성들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중력에 의해 서로 영향을 주는 상태임을 주장했다. 뉴턴의 우주관은 프톨레미의 이론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프톨레미의 이론, 아니 과학의 어떠한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증거들이 나오면서 퇴화하고 수정되었다 (출처이자 참고자료). 그리고 그 이후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주는 계속해서 확장하고 심지어 그 속도가 가속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물질은 사실 전체 물질의 5%도 안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의 우주관은 계속해서 요동치고 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는 표현을 어디서 들었다. 이 말을 한 작자가,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과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는 과정은 서로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싶다. 알았다면 정말 대단한 표현을 남긴 것이다. 우리는 상대를 알아갈 때, 우주관의 변화와 같은 과정을 겪는다. 단번에 그 사람에 대한 모든 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알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우주관을 이론화했다가, 수정했다가, 완전히 버리고 새로 제시했다가, 또 수정하는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특히 이 과정은 만남의 초기 단계에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고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는 상대에 대해 아는 게 가장 없을 때,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미지의 인물을 내가 아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단 안에 일단 끼워" 넣는다 (『키스 앤 텔』). 그리고 그 집단의 전체적인 특성으로 상대방을 설명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집단에 어울리지 않은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다른 집단으로 옮긴다. 그리고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이 사람을 머릿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지 못하겠다고 인정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그를 위해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 준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되는 역설과 비슷하다.
4.
원주율을 어림짐작하는 방법 중, 정사각형 안에 내접하는 원을 그린 후 무작위로 그 안에 점을 찍어, 원 안에 들어간 점의 개수와 전체 점의 개수의 비율을 따져 원주율을 계산하는 방법이 있다. 찍는 점의 개수가 많을수록 오차는 적어지고 예측값이 원주율에 수렴한다. 하지만 점을 무작위로 표시하는 초반에는 편차가 굉장히 심하다. 원주율의 실제 값보다 높았다 낮았다를 반복한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인듯하다. 하나의 점이 상대의 한 면이라고 한다면, 점을 찍고 한 면씩 알아갈 때마다 상대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평탄하지 못하다.
원주율은 무리수(無理數), 다른 말로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다. 대표적인 무리수에는 원주율 (3.141592...), 오일러의 수 (2.718281...), 2의 제곱근 (1.414285...) 등이 있다. 우리는 무리수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π, e, √2와 같은 기호들로 나타내고 일상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을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로 끝도 없이, 아무런 규칙 없는 숫자들이 나열된다. 사람도 하나의 무한소수다. 파이의 대략적인 값이 3.14임을 알듯이,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에 놀란다. 그러나 소수점을 따라가다 보기 시작하면 그 뒷자리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당황하기보다는 당연한 것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을 오래 보면, 예측을 멈추고 대응을 시작한다.
5.
우주관의 역사는 과학의 발전과 나란히 성장했다. 망원경이 생기고, 우주선이 개발되고,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우주의 신비를 파헤치는 인류의 능력도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래서 우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수용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마친가지로,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 있어서 관찰자의 능력도 중요하다. 관찰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지식, 경험, 성격, 소양에 따라 관찰 대상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공감하고, 감탄하게 되는 정도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만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6.
한 영혼을 탐구하는 작업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는 이 일을 매일 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