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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 벗 May 14. 2023

그냥이라는 가장 솔직한 대답

무의식이 먼저고, 의식은 그다음이다

1.

우리는 끊임없이 이유를 갈망한다. 왜 이유가 필요할까? 역설적이게도, 이런 질문을 통해 또 이유를 찾고 있다. 세상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본성쯤이라 해두자.


그렇다면 이유를 캐묻는 질문, 즉 "왜"로 시작되는 질문들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자. 굳이 조금만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이 질문의 꼬리의 꼬리를 물고 들어가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는 창조와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왜"가 외부 세계를 향한다면 우리는 대체로 잘 대답한다. 답을 알고 있지는 못해도 인터넷에 찾아보면 답이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 수많은 학자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덕에, 그리고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지식을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는 덕에, 사람들은 세상이 왜 이러한 모습인지, 세상에서 왜 저러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이해한다.


그러나 물음표의 방향이 반대로 꺾인다면 전세는 역전된다. 취향을 묻는 질문 (왜 너는 필기구를 좋아해), 버릇에 관한 물음 (왜 너는 특정 단어를 많이 써), 감정을 확인하는 질문 (왜 너는 나를 좋아해) 등 자신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자주 당황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에 관한 질의에 적절한 응답을 주기 위해 근사한 이유를 찾곤 한다. 그러나 자주 실패한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많나 보다, "그냥"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는 것을 보면.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냥이라는 답은 이유가 없음을 표명한다. 항상 이유를 갈망하는 우리이기에,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음', '몰라'가 가미되면 더욱 맥이 빠진다.

 

"그냥"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의 무책임한 대답일까?



2.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결론을 도출한다. 이유를 찾는 것도 이 행위의 일환이다. 뇌는 곧 이성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판단할 때 이성적인 사고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깨어있는 이성이 여러 상황을 고려해 최선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나의 판단은 옳아 보인다.


『바른 마음』에서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때, "직관이 먼저고 이성적인 추론은 그다음"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문제를 보고 판단할 때, 직관과 감정에 의해 순식간에 결론에 다다르고, 이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여 이유를 모색한다는 것이다.


직관이 먼저고 이성적인 추론은 그다음이다.



3.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만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의 사고 체계는 시스템 1과 시스템 2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시스템 1은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이며, 자동적인 반면, 시스템 2는 의식적이고, 논리적이며, 느리다.


1 더하기 1 계산하기, 두 물체 중 어느 것이 멀리 있는지 판단하기, 목소리만으로 화 나있는지 파악하기 등의 과제는 시스템 1의 관할 아래 있고, 17 곱하기 24, 시끄러운 방에서 상대방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책의 페이지에서 한 글자가 몇 번 반복되는지 세기 등의 과제는 시스템 2가 주관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부분 시스템 1에 의존하는데, 시스템 1은 오류와 편향에 굉장히 취약하다 (어떻게 취약한지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그래서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의식적으로 시스템 2의 전원을 켜야 한다.


자동적인 시스템 1이 먼저고 논리적인 시스템 2는 그다음이다.



4.

『타인의 해석』에서 말콤 글래드웰은 진실 기본값 이론 (Truth-Default Theory)을 설명한다.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무의식적으로 타인이 하는 말이 진실일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이론이다. 타인에게서 거짓말의 징후가 나타나도 우리는 속다가, 충분한 증거가 모였을 때 정신을 차리고 거짓말을 하는 상대를 발견한다.


진실에 대한 믿음이 먼저고 의심은 그다음이다.



5.

세 가지 책에서 내리는 세 가지 결론을 정리하면, 무의식이 먼저고, 의식은 그다음이다. 빠르고 무의식적인 판단력은 인류의 생존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믿고 있던 나 자신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다. 내가 하는 생각, 판단, 그리고 결정들에 대해 전적으로 의식적인 통제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식적인 내가 모르게 먼저 선수 치는 무의식적인 나의 존재를 인정할 뿐이다.


내 취향, 내 감정, 내 생각이 이렇다에 대한 이유를 꺼낼 때 버벅거리는 이유는, 무의식의 상태로만 존재하고 있던 개념들을 의식의 위치로 끌어와야 하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이유는, 애초에 결론만 있기 때문일지도. 이런 의미에서 “그냥”이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솔직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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