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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연 Sep 19. 2024

03. 나 사용설명서

우리가 공존하는 방식

어떤 물건을 처음 구입했을 때, 함께 동봉되어 오는 것, 바로 ‘사용설명서'다.


 사용설명서를 주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해당 물건을 사용할 때, 각 기능을 알맞게 사용할 수 있게 안내하고 유사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주의사항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사용설명서를 펼쳐보면, 어떤 구성품이 들어있고 기능은 무엇이 있는지, 예상되는 질문과 답변, 문제 발생 시 해결을 요청할 수 있는 고객센터 번호 등이 들어있다.

 흥미로운 건, 같은 제품군이어도 제조사나 브랜드에 따라 사용방법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가습기라고 해도 모두 다 같은 기능을 제공하진 않는다. 주의해야 할 부분도 약간씩 기술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품을 '제대로 오래도록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설명서를 유심히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연인 관계도 비슷하다.

우린 다 같은 사람이지만 크게는 남녀 성향의 차이가 있고, MBTI의 유형도 다르다. 심지어 개인이 살아온 배경도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연애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연애를 할 때나 결혼생활을 하는 중에도 각자의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나 사용설명서' 업데이트 버전을 제공해주곤 한다.



<나 사용설명서> 제공 배경

 우리 부부의 연애 초기에 내가 유독 섭섭했던 포인트를 떠올려본다면 '아플 때'였다.

20대 초부터 자취를 해왔던 나는 내 몸은 내가 잘 건사해 왔으면서 막상 연애를 시작하니 마치 어린애가 된 것처럼 챙김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나 어디가 아픈 거 같아ㅠㅠ'라고 이야기를 하면 신랑은 딱히 액션이 없었다. 지금도 그때 당시 신랑의 반응이 딱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무반응이었다. 가장 큰 반응이라고 한다면 '에구..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집 가서 얼른 쉬어' 정도였으니 말이다.


 처음엔 이 때문에 많이 싸웠었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당 VS '나는 진심으로 걱정돼서 한 말이었'당, 양당 간의 첨예한 대립이었다.

 나의 세상에서는 아프다면 상태도 물어봐주고, 약도 사다 주고, 더 보살펴주는 게 당연한 건데. 대체 이게 왜 안 되는 건지 이해가 도무지 되지 않았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닌 것 같았다.

 답답한 건 신랑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서 진심으로 걱정이 됐고, 그래서 걱정을 했고, 쉬라고까지 했다. 아픈데 자꾸 말을 걸고, 성가시게 굴면 더 힘들게 할 것 같으니 휴식시간을 충분히 보장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연락하고 싶은 것도 참았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 상황'에서 각자 어떤 것을 원하는지, 어떤 의도가 있는지, 어떻게 대응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서운한 마음이 생겼고, 이 마음이 갈등을 만들어냈다. <나 사용설명서>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렇게 감정과 대립의 연속일 뿐이었다.



<나 사용설명서> 1.0 버전 출시

 '이제 이 갈등의 굴레를 끊어보자.' 하고 고안해 낸 것이 <나 사용설명서>였다. 방법은 쉬웠다.


"자기야. 앞으로 내가 아프다고 하면 이 셋 중에 하나만 하거나, 셋 다 하면 돼.

(1) 얼마나 아파?

(2) 약은 먹었어?

(3) 병원 갈까?

알겠지? 이 세 개만 기억해 줘."


  애매하게 에둘러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맞혀보렴.' 해서는 우리의 관계가 쓸데없이 멀리 돌아갈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도 내 마음을 모르고, 나도 내 마음을 가끔 모르겠는데! 하물며 가족도 아닌 사람이 연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걸 귀신처럼 알아맞힐 수 없을 터였다. (알아맞힌다고 해도 수상했을 것 같다.)

 그러니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명확하게 이 사람에게 제시해 주었을 때, 설령 그것이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랑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 그에게 나를 다루는 법을 알려준 것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혹자는 이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엎드려 절 받아야 해?'라고.

그러게 말이다. 사실 이 방식을 떠올렸을 때,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마치 내가 사랑받고 싶다고 애절하게 매달리는 모양새 같아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까지 알려줬는데도 이를 하찮게 여긴다면 내 사람이 아닌 거지!’라는 확고한 결심으로 시도해 보았다.

 이후 남자친구 입장을 들어보니, 오히려 고마웠다고 한다. 여자친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어긋나는 방식으로 표현하며 갈피를 못 잡고 갈등을 겪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여자친구 맞춤형으로 표현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나 사용설명서> 리뷰/평점은?

 ★★★★☆ / 4.5를 드리겠다.

 이유는 이후로 우리의 관계가 훨씬 더 돈독해졌고 갈등의 주기나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신랑은 설명서의 질문을 사용하거나 때로 응용했는데, 항상 질문 안에는 진심이 들어가 있었다. 다시 말해, 형식적으로 ‘옛다, 네가 원하는 거다~’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진심 어린 모습을 보고 나는 신뢰를 점점 쌓아갈 수 있었다.


 신랑도 나에게 자신의 사용설명서를 알려줬다.

신랑은 컨디션이 안 좋을 때, 가만히 쉬게 해주는 걸 좋아한다. 내 방식대로 신랑을 대하면 신랑은 꽤나 성가셔했다. '나 그냥 쉬게 해 줘...'가 그가 원하는 관심과 사랑이었다.

따라서, 신랑이 제시한 <나 사용설명서> 1.0 버전은 '아플 땐 가만히, 알아서 쉬게 해 주기'였다. 나는 이것을 수용했고, 아프다고 했을 땐 가능한 한 접근을 최소화한다.

 


 그런데 나머지 0.5점은 왜 채워지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신랑도 가끔 사용설명서를 까먹고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대하다가 '아차!'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금세 설명서의 내용을 상기한다. 바로 사과를 하고 설명서에 +α까지 더해서 더 잘해주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서로만의 사랑의 방식을 이해하게 됐고, 그렇게 맞춰가고 있다.



‼주의사항

 다만, 여기서 주의사항이 있다. 이렇게 나 사용설명서를 알려주되 이를 악용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제시하고 각자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은 서로의 다름은 인정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해야 사랑받는다고 느껴'라고 강요하며 무리한 요구(금전, 성적행위, 가스라이팅 등)를 한다면 이는 사용설명서가 아닌, <기만> 일 것이다. 상대방이 제시하는 설명서의 내용이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거나 꺼림칙할 때는 '미안한데, 이건 내가 해줄 수 없을 것 같아.'하고 당차게 거절해도 된다. 나 또한 신랑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었다면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서로에게 확인시켜 주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나의 욕심이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임을 꼭 거듭하여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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