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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PD Nov 15. 2023

#13. 친구와 함께 낯선 거리에 놓이다

그날은 회사를 다닐 때처럼 일찍 일어났다.   


60대 남자라면 옷장에 교복처럼 등산복이 걸려있다. 공원을 가든, 산에 가든 나이 든 남자들의 패션은 한결같이 회색 상의와 검정색 하의의 등산복이다. 내가 보기에도 좋아 보이진 않지만, 옷을 사러 가면 꼭 똑같은 디자인과 색깔에 손이 간다. 검정색 바지는 불변이고 상의까지 블랙은 부담스럽고 흰색은 때가 타니, 자연스럽게 회색을 선택하게 된다.  

여름 등산복은 그나마 가격이 저렴해서 다른 색깔과 무늬가 들어간 옷을 사기도 하지만 겨울옷은 비싸기 때문에 튀지 않고 무난한 옷을 사야 해서 ‘교복’화 되는 것 같다.  

친구와 똑같은 옷을 입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베이지색 건빵바지 스타일의 바지와 파나고니아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튀어나온 배를 가리기 위해 얇은 바람막이도 하나 챙겼다.  

아직 집사람과 딸은 자고 있는 것 같다.  

조용히 마트에서 산 누룽지 한 봉지를 끓여, 마시듯 먹고 오이와 자유시간 초콜릿 몇 개, 사과 두 개를 가방에 넣었다. 퇴직선물로 딸이 사준 값비싼 K2 등산화도 신고 집을 나섰다.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친구는 서글서글한 외모에 농담을 잘해서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지금은 카페 한 군데와 서울근교에서 캠핑장을 운영하고 있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았지만 생각은 비슷했다. 특히 정치성향이 비슷해서, 친구의 카페에서 정치 이야기로 몇 시간씩 수다를 떨기도 했다.  공동으로 씹을 적이 있다는 건 사이를 더 돈독하게 해 주기 마련이다. 보통 이 나이의 남자들은 곱창집이나 막걸릿집에서 건아하게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싸우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술을 잘 마시지도 못했고 즐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유종아, 산보다는 니네 캠핑장이 낫지 않냐?”


수락산역입구에서 친구를 만나자마자 반갑게 물었다.


“너는 맨날 캠핑장, 캠핑장. 지겹지도 않냐?”  

“나는 좋던데 매일가도 갈 때마다 느낌이 새로워”  

“그렇게 좋으면 니가 한번 해볼래? 내가 싸게 넘길게”  

“야, 이모들이 왜 조카를 이뻐하는지 아냐? 잠깐씩만 봐서 그래, 난 그냥 잠깐씩 보면서 니 캠핑장에 대한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싶다”  

“그럼 와서 알바라도 좀 해라. 캠핑장이 이것저것 손이 많이 가. 가끔 쓰는 알바애들은 핸드폰만 쳐보고 있고… 니가좀 와서 일 좀 해라. 최저시급정도는 쳐줄께“  

”아이고 서대표님 그러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친구와 만나 농담을 주고받으며 역을 빠져나오려고 하는 그 순간, 큰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폭탄 소리가 분명했다. 첫 번째 폭탄 소리가 들리고 이후에 다발적으로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들렸다.


“야, 이거 폭탄소리 아니냐?”  

“맞는 거 같은데…”  

“테러면 한두 번만 들릴 텐데 폭탄이 왜 끊이지 않고 터지지”  

“시발, 이거 전쟁 난 거 아냐?”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에 대부분의 노인들이 웅성웅성거리고 간혹 젊은 등산객들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하거나 지하철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나가봐야 하나… 아님 지하로 더 내려가야 하나…”  

“포격이면 지하가 안전할 거 같지 않냐?”  

“그럴 거 같긴 한데 위에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때 지하철 입구 쪽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내려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노인들이었고 아이손을 잡은 엄마도 있었다.


“위에 어떻게 된 거예요? 전쟁이라도 난 거예요?”  

“모르겠어요. 여기저기 폭탄이 터지고 불이 나고 연기 나고 전쟁 난 거 같아요”


아이엄마를 부축하면서 일단 지하로 더 내려갔다. 폭음이 들릴 때마다 천장이 흔들렸고 전등이 깜박거렸다.  

그 순간 집에 있을 집사람과 딸이 생각났다. 전화기를 들어 전화를 걸어봤지만 안테나가 뜨지 않았다.


“유종아 너 핸드폰 되냐?”  

“아니 나도 안테나 안 뜬다”  

“야 너 해병대 나왔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  

“민간인 된 지 40년 됐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자, 우리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자, 흥분하지 말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상황파악도 안 되고 핸드폰마저 터지지 않는 깜깜한 상황이다.   

지하를 둘러봤다.  

개찰구 앞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입구에서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 같다. 플랫폼으로 더 내려가던지 아니면 올라가던지 결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친구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계속 내려오면 여기 오래 있기는 힘들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올라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게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금방 끝날 상황도 아니고 여기 있다가는 사람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할 수도 있겠어”  

“위에 가면 핸드폰이 될지도 모르고…”


친구와 의견을 나누고 지상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각 출입구에서 밀려내려 오는 사람들을 비집고 위로 올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포탄 터지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두려웠지만 친구와 함께 역 밖으로 나오자 영화 속에서나 보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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