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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Apr 07. 2024

여고동창생

추억을 먹다

대관령 고개 중턱 어디쯤에 빼어난 산새를 바라보며 소박하지만 그림 같은 산장 하나가 있다.

오래전 그 산장을 마련한 주인은 일 년이면 몇 차례 씩 그곳을 찾는다.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과 동행하는 일이 대부분인데 그럴 때면 흐르는 물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고개를 넘어가는 바람소리도 함께 어우러져 평소에는 고요하게 존재하는 그곳에 사람향기 자연향기 가득한 숨결이 들쑥날쑥 대기 시작 한다.

봄이 시작되는 어느 날, 

4명의 여고동창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찬 발걸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겨우내 닫혀있던 모든 문들은 만개한 꽃들만큼이나 밝게 피어난 햇살 덕분에 스스럼없이 열리고 환한 빛을 머금은 방안은 어느새 떠들썩해졌다.

아랫마을 읍내 장터에 들러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감자나 옥수수, 수수부꾸미, 시래기 등 계절에 맞는 먹거리들을 구매하는 일을 루틴으로 본격적인 1박 2일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제는 단골 집도 생겨서 특별한 살 거리가 없을 때도 빈둥거리며 시골장을 돌아보는 시간은 이 지역의 참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라고 한다.

수수부꾸미, 메밀전병을 애피타이저로 우대갈비, 송어회 가 이번여행의 주메뉴이다.

직접 해 먹어야 하는 부담감이 있을 법도 하건만 마음 편한 친구들과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해 먹는 일이 빠져서는 안 될 그녀들 여행의 첫 번째 항목이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음식 준비로 부산을 떨며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저마다 각자 맡은 바 임무에 한참 동안 집중한다.

바비큐 장비를 꺼내다가 장작을 피우고 요령 있게 연기를 따돌리며 가끔 미풍이 불어오는 먼산 아래 구름으로 시선을 잠깐 돌리는 등 딴청을 피우면서도 손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이 이미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녀들은 계절마다 정기방문을 하는 고정멤버이다.

날씨가 좋으면 산장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냉이나 쑥을 캐고 야생화들과 대화하며 주변을 산책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멀리 산이 보이는 대청마루에 나란히 몸을 누이고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학창 시절 얘기들을 추억하느라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마저 삼켜버릴 정도다.

또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 겨울날이면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눈앞의 풍경에 입 밖으로 내는 숨소리 마저 소음이 될까 숨죽인 채 사방의 고요함에 한동안 넋을 잃는다.

그렇게 모여 60이 가까운 나이가 된 그녀들은 자신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의 아야기를 비로소 스스럼없이 꺼낸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 지금의 안정된 생활을 하기 전까지 그녀들이 겪었던 다양한 세월의 흔적들이 각자의 표정 안에서 때로는 애잔한 눈빛으로 또 어느 순간엔 희열에 가득 찬 떨림으로 다가온다.

결혼 후 사고로 남편을 잃고 시댁과도 인연을 끊고 어린 남매를 키우며 생활전선에 뛰어든 친구는 지금은 누구보다도 멋진 인생을 설계하며 살아가고 있어 남부러울 게 없다.

그런 고통의 시간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세상을 원망하기보단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희망을 보려고 무진 애를 썼던 각오들이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다.

외로움을 힘듦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다 잔잔하게 부는 바람이 되어 서로의 등을 말없이 밀어주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오늘 그녀들은 조금 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들은 이렇게 만나 배가 아플 만큼 거침없이 웃고 서로의 눈가에 깊이 새겨지는 주름만큼이나 소중한 순간을 역시나 서로의 가슴속에 깊이 새긴단다.

숱하게 많은 별들이 눈 안 가득 달려들 때 이미 메마른 줄 알았던 가슴은 어찌 그리 콩닥대며 뛰던지.

밤새 소곤대던 풀벌레 들은 역시나 하얀 밤을 지새우던 그녀들의 비밀스러운 옛이야기들을 다 들었을까?

선생님을 몰래 짝사랑했던, 강당 안에서 남학생과 데이트하다가 문이 잠겨 친구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했던, 자율학습 시간 몰래 담을 넘어 땡땡이를 쳤던 곳이 겨우 학교 앞 단골가게였던, 그 시절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사소한 반항들이 그녀들을 지탱시켜 주었던 시간들이었음을.

그녀들의 시간은 어느새 오래전 그날에 머물러있고 서로의 눈동자안에 갇힌  다정한 웃음은 그녀들의 어린 시절 모습으로 투영된 채 아련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셀 수 없이 많은 날에도.... 이곳에서 그녀들의 시간여행은 계속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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