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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미골 Apr 23. 2023

배신

슬기로운 농촌생활


요 며칠 날씨가 흐렸다. 소나기가 한줄기 내리지 싶다가도 날은 살살 깨어나고 식물들은 가뭄에 지쳐 보였다. 맛보기로 땅거죽만 적셔놓고 해는 힘이 세지고 기온은 오 월 하순이다.

이런 날엔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다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서울에서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다 보면 영동을 지나 김천, 구미역을 통과하게 된다. 김천에 들어서면서 ktx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이때에 바깥 풍경은 푸른 바다가 아닌 하얀 바다가 보인다. 국내 1호 추풍령 휴게소에서부터 백옥 하게 들어선 비닐하우스는 그야말로 하얀 바다를 연상케 한다. 어쩌다 군데군데 흙이 보이는 밭은 하얀 바다에 떠있는 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ktx가 현저히 속도를 늦추는 그 어디 즈음이 김천 포도 특구 지역이다. 그곳 반대쪽으로 작은 내를 따라 길게 자리한 네 개의 동네가 ‘자자’ 모임의 멤버들이 포도 농사를 짓고 있는 곳이다. 넓은 뜰을 앞에 두고 산골짜기까지 주욱 이어져 있다. 은자와 귀자는 교통이 좋은 마을에서 살고 있고 봉자와 자영은 문화생활이 불편한 산골짜기에서 살고 있다. 필자는 이런 산골짝에서 시내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니까 비교적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러 매일 출퇴근을 하는 것이다. 요즘 같은 농사철엔 집은 하숙방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도 큰일이 뻥뻥 터지곤 한다. 


해마다 피할 수 없는 년 중 행사 같은 그 큰일에 이번엔 도식의 두 친구가 당했다.  큰일이란 비닐하우스에서 잘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가 고온 피해 입는 것이다. 말이 고온피해이지 그 실상은 매우 참담하다. 비닐하우스 창이 열리지 않아 내부의 온도가 50도를 넘어가면 포도나무 잎은 채소처럼 삶긴다. 일 년 농사가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나무조차도 못 쓰게 된다. 못 쓰게 된 나무는 당장 눈앞에서 없애야 스트레스를 덜 받으므로 나무를 철거할 때의 심정은 자해 수준이다.

 도식과 몇 명의 친구가 고향을 지키고 있을 때 남보다 먼저 귀농한 불알친구 정영갑이 관내에서 첫 번째 피해를 입었다. 자나 깨나 하우스 온도관리에 만전을 기해도 귀신의 장난질에 놀아나는 것처럼 일이 터진다. 이런 대형사고의 발생원인은 시설 자동화에 있다 자동화는 버튼 하나로 사방의 창을 여닫는다.

 자동버튼은 매우 편리한 이점이 있으나 시설물의 손상과 고온피해라는 심각한 오점이 있다. 하우스 내부의 센서는 온도변화에 예민해서 찾을 쉴사이 없이 여닫게 한다. 외부의 빗물 감지기 센스는 날아가던 새가 똥이라도 눈다면 이를 빗물로 감지해서 하우스 창을 닫는다. 이럴 땐 이상고온으로 농작물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수동버튼은 온도에 맞추어 수시로 작동시켜야 한다. 직접 조작하므로 시설물의 손상을 줄일고 농작물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 그러나 한정되어 있는 시간에 쫓기게 되고 노동력의 손실이 많으며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영갑은 수동의 불편함 개선하고  몇 자리나 되는 밭을 자동으로 교체하여 편리하게 농사지었다. 그런 영갑에게 신은 남다른 능력을 주었다. 그것은 기계를 한 번만 보면 회로를 훤히 꿰뚫어 복사하는 것이었다. 영갑의 능력은 친구의 밭으로까지 범위를 넓혀 갔고 자신의 능력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영갑은 자제 구입과 cctv 설치를 직접 하고 개폐기의 작동을 폰으로 확인했다. 


 영갑은 올해도 남보다 일찍 농사를 시작했다. 포도밭 한 자리에 작년 12월 말부터 비닐하우스 창을 닫고 기름보일러를 가동했다. 4월이 되고 이 밭 저 밭에 포도순이 나자 매일 밭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럴 때 쓰라고 만들어 놓은 CCTV는 폰으로 확인이 되어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었다.

이쯤 되자 영갑은 자만이었는지. 아니면 안전불감증이었는지. 확인이 나태해지고 결국은 고온피해 사달이 난 것이었다. 하우스 내부의 고온 부저음을 듣은 밭이웃 어르신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상황 종료였다.      


영갑은 눈앞이 하얗고 다리가 풀렸다.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입을 벌린 채, 무얼 봐야 할지를 모르는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해머로 얻어맞은 듯한 머리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이웃 밭 어르신이 등짝에 스메싱을 날렸을 때야 비로소 시야에 초점이 잡혔다. 어르신이 건넨 냉수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냉수인지 맹수인지가 꽉 막힌 소리를 지르며 벌어지지 않는 목구멍을 밀고 들어갔다.

 어르신은 몸 성하면 괜찮다고 농사야 내년에 다시 지으면 된다고 위로를 했으나 영갑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필요치 않았다.

 뜨거운 물에 데쳐 놓은 듯한 포도 잎은 혀를 길게 늘어뜨렸고 팥 알 만했던 포도는 썩은 동태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 눈은 계속 무엇인가를 찾았고 다리는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질 않았다. 어르신은 영갑의 옆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햇빛이 누그러졌다. 영갑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개폐기 버튼을 수동으로 작동시켰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소나기 몇 방울에 휴즈가 나간 것이 원인이었다. 고작 그 비에 휴즈가 나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4개월 동안 아무 탈이 없었으니까.

 이 꼴 보려고 발품 손품 팔아서 자동 만들어 놓았나 싶었다. 그 추운 겨울에 땐 비싼 기름값이 얼마이며 다 키워놓은 포도 순이며 한창 이쁜 포도알은 또 어떻고..... 

굳은 다리를 일으켜 세워 포도밭을 둘러보았다. 오지게도 삶겼다. 사월 초순 온도에 이렇게 야무지게 삶길 수 있는 것인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노름 좋아하는 영갑이 객지에서 큰돈을 잃고 어린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었을 때도 이만큼은 허무하지 않았다.


 영갑은 가슴을 쳤다. 갈비뼈가 퍽퍽 소리 내어 울었다. 두 주먹에 소금보다 짠 눈물이 흥건하게 베였다.

  자동을 자신의 마음처럼 믿었으니 세상에 믿을 것 못 되는 자동이었다. 아니 믿을 것 못 되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자동에 당한 배신이 이렇게 쓸 줄이야. 

자동 좋다고 마실 나가서 자랑질은 얼마나 했던가. 내심 신이 주신 능력이라고 얼마나 우쭐해했던가. 친구 밭에도 cctv를 설치해 주었던 영갑이 아닌가. 말 많은 촌 동네에서 스타일 구겨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영갑을 만만하게 보는 친구 놈들은 또 어떻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늘어진 혓바닥 같은 포도 순이나 영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영갑이 포도밭에 고온피해를 보자 농협에서는 농민들에게 ‘농작물 고온피해 경고’ 문자를 휴대폰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사달은 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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