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운디드힐러 큐브-
우리는 인생을 흐르는 강물처럼 느낄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강가에 앉아 나 자신을 돌아보면, 마치 이 흐름과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 강물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연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와 나는 하나야." 라고,
마음은 복잡하고 다층적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신경과학에서는 이 자아 개념이 단순한 착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뇌는 특정한 상황에서 자아를 형성하지만, 그 자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즉, 자아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식의 구조물일 뿐입니다.
거울을 바라보며 "이게 나야"라고 생각할 때, 그 생각은 순간적인 인식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자아가 경험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과 성장 과정에서의 변화는 결국 ‘나’를 재구성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워지고, 때로는 익숙해지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식적인 질문을 더 깊이 탐구해봅시다.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고민해온 주제입니다. 우리는 뇌가 활동하면서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걸 의식의 하드 문제라고 합니다.
의식의 하드 문제는 "우리는 왜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사과를 떠올릴 때, 그 사과의 색깔, 맛, 냄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첫 번째로, 문제의 예시를 들 수 있습니다. 사과를 보며 "빨갛다"라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 "빨갛다"는 느낌이 왜 생기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감정이나 경험이 바로 '하드 문제'라고 불립니다.
두 번째로, 의식의 하드 문제는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영화의 줄거리나 배우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만, 관객이 영화를 감상할 때 느끼는 감정이나 감각이 왜 그렇게 생기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의 한계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뇌의 활동을 연구하여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이유를 밝히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뇌에서 발생하는 전기 신호가 어떻게 감정이나 경험으로 이어지는지는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의식의 하드 문제"란 뇌가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지만, 왜 그런 정보를 '의식적으로' 경험하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뇌가 빛을 받아들이고 색을 인식하는 과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빛이 우리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컴퓨터가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 컴퓨터가 그 이미지를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뇌도 정보를 뇌에서 처리하지만, 왜 이 정보가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느낌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명상은 ‘나’라는 의식에 대해 흥미로운 접근법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깊이 호흡하며 의식을 내면에서 고요하게 바라보면, 어느 순간 ‘나’라는 의식이 사라지고 오로지 바라봄만 남게 됩니다. 이때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사라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듯한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근원적 자각이라고 부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몸도 나가 아니고, 생각도 나가 아니며, 기억도 나가 아니고, 행동도 나가 아니며, 그 모든 것을 통괄하는 의식도 나가 아니라는 것을. 왜냐하면 바라봄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양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찰과 현상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관찰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의식을 바라보는 것이 근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근원과 연결되는 순간 걱정과 근심, 집착 등이 사라지지만, 명상을 끝내고 ‘나’를 의식하는 순간 다시금 나타납니다. 결국, 걱정과 집착은 우리가 의식을 나와 동일시했기 때문에 생겨났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래전 동양 철학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적이라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이는 현대의 양자 물리학에서도 유사하게 설명됩니다. 관찰이 없으면 현상이라는 결과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존재와 경험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통찰은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고정된 존재로 여기고 집착함으로써 괴로움을 겪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자아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의식이 스트레스와 불안을 키운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상과 같은 내적 탐구는 이러한 집착에 대한 의식을 부드럽게 허물어줍니다.
결국 의식이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주변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친구와 함께 놀면서 "나는 지금 재미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의식의 작용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어떤 날일까?"라고 생각하는 순간도 의식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의식에 포함됩니다.
의식은 우리가 주변을 인식하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길을 걸을 때 자동차가 오는지, 친구가 손을 흔드는지를 아는 것도 의식 덕분입니다. 결국, 의식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사람들은 의식을 나라고 동일시합니다.
결국, ‘나’라는 것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의식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몸과 생각, 의식 모두 세포라는 하드웨어에 담긴 생존 프로그램에 불과합니다. 의식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에 연결된 것처럼 의식이라는 프로그램에 연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이 가진 ‘나’에 대한 집착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는 의식과 나를 연결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과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스마트폰이 인터넷에 연결된 것처럼, 나와 내면의 연결은 우리에게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런 작은 통찰들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이 이해하고,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