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눈이는 노래한다. 정확히는 <개구리 왕눈이> 감독의 지휘 아래 작사가의 손끝에서 탄생해 주제가 가수의 목소리를 빌린 것이지만, 왕눈이는 노래한다.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노래가 주문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개구리 왕눈이>의 왕눈이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Happy ever after(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식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왕눈이뿐일까. 새천년 세대(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에서 발표한, '밀레니얼 세대'를 대체하는 용어), 그중에서도 초중반에 태어난 세대의 유년기를 가득 채운 TV 만화의 핵심 기조는 전부 대동소이하다. <피구왕 통키>, <축구왕 슛돌이>, <슈퍼 그랑죠>, <세일러문> 등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만화의 주인공은 입을 모아 말한다. 포기하지 말고, 넘어지더라도 계속 일어나라고.
영화 <라이온 킹> 과 <나 홀로 집에>가 떠오른다. VHS 대여 비디오와 TV를 통해 무수히 많은 만화 애니메이션을 접했지만 유독 나를 사로잡았던 두 편의 영화도, 성인이 된 후 그 무한한 우호적 감정의 기저에 깔린 이유를 돌이켜보니 마찬가지였다. 좌절과 시련과 고초에 고통받고 흔들릴지언정 주인공은 어떻게든 발걸음을 내디디며 맞서 나간다. 초등학교 이전의 몇 년과 초등학교 6년에 수놓인 매일의 저녁은 한 명의 관객으로 이들의 이야기에 초대받아 봄날의 꽃밭 같은 미래를 꿈꾸던 시간이었다.
아마도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부터 못해도 30대에 다다를 때까지, 어디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주인공의 고군분투하는 삶의 여정과 당연하다는 듯 주어지는 행복한 결말을 그려내는 창작물은 전혀 보지 않았다.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라 여겼기 때문이다. 수능 시험을 실패하고, 대학 생활 적응도 반절은 실패하고, 제대로 다시 시작해 보고자 했던 미국 유학 생활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접어야 했고 정신 차리니 30대가 되어 있었던 나의 현실. 자국을 헬조선이라 칭하며 울분과 허무함으로 자조하는 현실. 격렬히 어두워져가는 각종 격차와 갈등으로 들끓는 현실. 최소한의 안정과 꿈꿀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맨 온 파이어>를 보게 된 것이 대략 이때였다. 30대에 막 접어든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동명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속 덴젤 워싱턴은 삶의 의미를 되찾아준 꼬마 친구 다코다 패닝의 생환을 위해 맞닥뜨린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고통을 참으며 걸어간다.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그곳, 그녀의 안전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꿔야만 하는 그곳으로. 액션 영화로 분류되지만 단순한 액션 영화에 그치지 않았다. 무의미한 삶의 고통을 술로 잊으려 한 처음의 모습에서 단 한 사람을 위해 피투성이 가시밭길을 걸어간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2시간 30분은 내 삶에 크나큰 풍랑을 일으키기에 전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후의 수순은 쉽게 예측할 수 있겠다. 덴젤 워싱턴의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한 필모그래피를 하나씩 옮겨 적었고 가능한 선에서 그가 먼저 걸어갔던 길을 뒤늦게나마 좇았다. 1990년대 후반의 <말콤 X> 와 <필라델피아>, 2000년대 초반 개봉한 <존 큐>와 앞서 소개한 <맨 온 파이어>, 2010년대로 들어서 2023년까지 이어진 <더 이퀄라이저> 3부작, <펜스> 그리고 <로만 J 이즈레일, 에스콰이어>까지.(추천이 필요하다면 <맨 온 파이어>, <존 큐>, <펜스>, <로만 J 이즈레일, 에스콰이어>를 꼽겠다.)
사정이 이러하니 끊임없이 대두되는 문제점이 열 손가락을 훌쩍 넘길 만큼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유튜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단조로운 하루를 닫기 전 덴젤 워싱턴의 연기를, 짤막한 조각에 불과한 잠깐의 연기라 할지라도, 유튜브에서 찾아봤다. <맨 온 파이어>의 경우 전체 영화를 본 횟수만 세도 10번이 넘어가지만 유튜브를 통해 해당 영화 파편을 시청한 횟수는 수십 번을 넘어 백 번이 넘는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 인물로 범주를 나눠 인물별 재생 시간을 통계 낸다고 가정하면 압도적인 1위 자리에는 덴젤 워싱턴의 이름 말고는 어떠한 이름도 놓일 수 없다. 이것은 또한 30대 초반부터 시작해 여전히 고수하는 일종의 관습이자 습관이고 경건한 의식에 가까운 행위이다.
미국의 대학교 졸업식은 흥미롭다. 기본적인 것은 우리와 비슷하겠으나 사회 유명 인사의 축하 연설로 방점을 찍는 전통이 현존한다. 연설의 주제 또한 저마다 크게 다르진 않지만 곧 사회에 뛰어들 젊은 친구들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언제나 은은히 향기롭다. 미국 예능과 한국 예능의 큰 차이점을 하나 지적한다면 토크쇼의 유무이고, 그래서 한국 예능은 더는 보지 않는다. 사회자와 초대 손님이 비스듬히 마주 보고 앉아 짧지만 유쾌하고 깊으면서 때로 직설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한국에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손님의 최신 작품을-그것이 영화이든 음악이든-홍보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에 녹아든다. 미국과 영국의 연말 시상식 또한 큰 볼거리다. 수상자의 소감이 보다 더 다채롭고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전작인 『13mm의 거리』에서 이 부분을 좀 더 언급하기도 했다.) 졸업식 축하 연설, 토크쇼, 그리고 시상식의 수상 소감. 이 사이에 역시 덴젤 워싱턴이 존재한다. 유튜브를 애정해 마지않는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덴젤 워싱턴의 연기를 감상하는 의식과 병행하며 그가 남긴 각종 연설을 찾아본다. 새로운 연설이 자주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본 영상을 보고 또 보는 행위이지만, 영어 연습의 목적은 늘 온데간데없이 그의 표정과 몸짓과 웃음과 목소리 앞에 앉아 깊은 사색에 빠진다. 그는 말한다.
"Fail big. Fall forward. Fall seven times and get up at eight."
(크게 실패하고 실패하더라도 전진해라. 일곱 번 실패했다면 여덟 번째 성공하면 된다.)
"If you don’t fail, you’re not even trying."
(실패하지 않는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학원 영어 강사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동시에 그 상태에 안주하려고 했던 나를, 그는 바꿔놓았다. 10대부터 20대까지 항상 예상되는 결과가 두려워 그것이 일이든 인생이든 친구 관계든 사랑이든 머뭇거리고 회피만 했던 나를 그는, 근엄하게 꾸짖었다. 기꺼이 그의 문도가 되었다. 영어회화 수업만 고집하지 않았다. 영역을 확장해 공부하고 분석하며 내 실력 또한 향상시켰다.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했다. 설혹 돈을 받지 않는다 해도 개의치 않았다. 동시에 우리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혼자서도 쓰고 글모임에 가입해서도 꾸준하게 글을 썼다. 사랑을 찾았고, 사람을 사랑했고, 사랑을 떠나보내기를 반복했다.
“Dreams without goals are just dreams, and they ultimately fuel disappointment. To achieve your goals, you must apply discipline and consistency.”
(목표가 없는 꿈은 그저 꿈일 뿐, 궁극적으로 실망감만 부추긴다. 목표를 이루려면 반드시 자기 단련과 꾸준함이 있어야 한다.)
"Without commitment, you’ll never start, but more importantly, without consistency, you’ll never finish."
(전념하지 않으면 시작도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 없다면 절대 끝마칠 수 없다.)
"Ease is a greater threat to progress than hardship. So, keep moving, keep growing, keep learning."
(편안함은 발전에 있어 고난보다 더 큰 위협이니 계속 움직이고 발전하고 학습해라.)
어쩔 수 없다 자조한 현실의 문제 앞에 현실을 포기하고 미래를 닫아 버린 채 30대로 접어든 나였고, 덴젤 워싱턴의 철학을 손에 쥐고 무작정 발걸음을 뗀 나였다. 자칫 쉽게 길을 잃을 수도 있었을 당시의 내게 그가 강조한 꾸준함과 자기 단련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침판이었다. 매일의 목표를 세웠다. 목표의 목적을 잊지 않고 명확하게 새겨두었다. 영어 교수법을 시도하고 강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영어 모임을 운영했다. 수업 자료를 소위 '돌려막기' 하지 않고 계속해서 개발하고 만들어냈다. 일환으로 영어 교재의 감수에도 참여했다. 외국인 뮤지션의 국내 독립서점 콘서트 투어를 기획하고 통역을 맡았다. 지속적으로 쓴 글을 모아 독립출판으로 무대를 옮겼다. 열 군데가 넘는 글쓰기 수업을 찾아다니며 5권의 책을 썼고 독립출판 박람회에 약 15번가량 참여했다. 독립출판작가 커뮤니티를 조직해 운영하기 시작했고 예술창작팀을 꾸려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영어를 쓰고 글을 쓴다. 햇수로 16년 차 영어 학습자이자 14년 차 영어 강사로 살고 있고 햇수로 10년째 글을 쓰고 있고 햇수로 4년째 독립출판 작가로 책을 펴내고 있다.
2025년 들어 챙겨 보는 유튜브 채널 <The Hollywood Reporter>를 소개하고자 한다. 명칭에서 이미 드러나듯 할리우드 영화계의 소식을 전하는 유튜브 채널로 특히 5-6명의 영화인을 섭외해 둥그런 탁자에서 대화를 나누는 'Round Table'을 좋아한다. 약 50분-60분 가량의 영상은 나처럼 말 많고 글이 긴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역시나 덴젤 워싱턴이 출연한 영상은 7번쯤 본 듯하다. 영상 말미 그는 말한다.
"Your son got shot in the face? That's difficult. Making a movie is a luxury. It's a gift. It's an opportunity and most importantly it's a gift."
(아들이 전쟁터에서 얼굴에 총을 맞는 것이 진정 어려움이고 고통이자 아픔이죠. 영화를 한다는 것은 호사입니다. 선물이죠. 기회이며 무엇보다 선물인 것이죠.)
우리나라에 국한해서 봐도 부모 중 한쪽을 잃은 사람이 나 혼자일 리가 없다. 반칙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으며 한 달 일해서 카드값 내고 집세 내고 남은 돈에서 몇 푼 떼어내 적금 붓고 가끔 친구들과 가끔 혼자서 맥주 몇 캔 기울이는 걸로 만족하는 게 나 혼자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대가로 돈을 벌고 선생님 소리를 듣고 글을 쓰며 책을 출판해 작가님 소리를 듣고 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꽤 다채로운 경험을 채워나가고 있다. 호사를 누리고 있음을, 기회와 선물이 주어졌음을 늘 명심하고 산다.
"I pray that you all put your shoes way under the bed at night so that you gotta get on your knees in the morning to find them."
(여러분 모두가 잠들기 전 침대 깊숙한 곳에 신발을 넣어두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신발을 꺼내기 위해 무릎을 꿇을 테니까요.)
그까짓 영어 조금 읊어댈 수 있다고, 남들보다 익숙하게 글 조금 쓸 수 있다고, 인터넷에 검색하면 내 책과 내 이름과 내 프로필이 검색 결과로 나온다고, 어디 가서 작가님 소리 조금 듣는다고 내가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마냥 목과 어깨를 뻣뻣이 할 때마다 그의 발언을 되새긴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겸손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도록 매일 되새긴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유 소득 계약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잘 팔리지 않는 책을 계속해서 펴내는 독립출판 작가로서의 삶도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감정적으로 늘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일이라고 말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 영어강사이고 독립출판 작가의 삶이다. 그 앞과 뒤에 '하지만'을 붙일 수 있는 이유가 없다면 진즉 포기했을 일이다. 덴젤 워싱턴의 영화와 연설과 철학이 없었다면 말이다. 2017년 NACCP Image Awards에서 영화 <펜스>로 수상한 그는 말한다.
"See you at work."
(촬영장에서 봅시다.)
계속해서 영어를 가르치고 계속해서 글을 쓰고,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계속 책을 펴내는 영어강사이자 작가인 나는 덴젤 워싱턴을 만나기 위해 오늘도 영어를 가르치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