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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멋지기 Aug 03. 2024

자아에 대하여

영화「판타스틱 Mr. 폭스」평론


들어서며


각종 동물이 살아가는 세상 속 여우와 인간의 대립, 그리고 야기된 혼란스러운 상황에 휩쓸리는 그의 가족과 이웃 동물들. 영국 소설가 로알드 달의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의 손에서 탄생한 애니메이션 영화「판타스틱 Mr. 폭스」는 스톱모션 촬영 방식에 웨스 앤더슨 특유의 색 선택이 섞이면서 굉장히 독특한 감성을 담고 있다. 게다가 등장하는 모든 동물 캐릭터에 사람처럼 옷을 입히고 사람처럼 행동하게 함으로써, 할리우드 명배우들의 더빙까지 더해져, 영화에 등장하는 몇 명의 진짜 인간 캐릭터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게 하는 마법까지 부린다.    


영화가 품고 있는 독특한 특성에 더해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여러 동물의 모습과 행동을 통해 감독은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깊은 곳의 근원에 대해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대하는 가장 권장할만하면서 즐겁기까지 한 자세는, 아래 소개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영화의 내용을 끝에서 처음으로 거꾸로 되짚어가는 것이겠다.   


하나. Mr.폭스와 그의 아들 애쉬Ash의 관계는 그저 부자관계에서 그치는 것인가?

둘. 왜 Mr.폭스는 사냥 대신 인간 농장에 침입해 음식물을 훔치는 것인가?

셋. 왜 Mr.폭스는 도심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싸움에서 이웃 동물들의 라틴어 이름을 언급하는가?

넷. Mr.폭스로 인해 벌어진 모든 소동과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다섯. 왜 Mr.폭스는 늑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것인가?     


진화의 목적 혹은 결과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여러 기준 중 하나는 자아의 인지와 형성일 것이다. 군락을 이루는 동물이 존재하지만 그조차 인간이 모여 만든 사회에 비할 수가 없고, 인간은 또한 큰 사회 안에서 무수히 많은 작은 집단을 이루고 산다. 그 과정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끝없이 탐구하고 확립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를 깨닫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이름을 짓는 행위일 것이다. 개인에게 부여하는 이름부터 직책, 직위, 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의 특징 중 하나는 등장 동물 중 별도의 이름을 가진 동물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인 아빠 여우조차 미스터 폭스(Mr. Fox)이며 부인은 미세스 폭스(Mrs. Fox)이다. 그 외 등장하는 대부분의 동물은 별도의 이름 없이 해당 동물의 기존 이름이 극 중 이름으로 쓰인다. 오소리(Badger)는 오소리이며 쥐(Rat)는 쥐인것처럼.     


고유의 이름을 가진 동물로는 두 여우의 아들 애쉬(Ash), 그의 사촌 크리스토퍼슨(Kristofferson), 여우 가족이 새로 이사 간 집의 관리자이자 어쩐 일인지 같이 거주하게 된 주머니쥐 카일리(Kylie), 그리고 영화 중후반부에 잠시 언급되는 수달 린다(Linda)가 있다. 이들과 이름이 없는 동물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자신만의 이름을 가진 동물은 이름을 부여받을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애쉬는 이름을 지어준 부모가 있고, 애쉬의 친척 크리스토퍼슨 또한 아버지의 존재가 대사에서 언급된다. 카일리는 관리하는 업무를 부여받은 관리자이며, 린다의 경우 이름이 언급되는 장면에서 비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스갯소리로 한국인은 이름 붙이는 걸 너무 좋아한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되려 서양 문명에서 그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모든 존재에 이름을 붙이며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에도 각각 꼬리표를 달아둔다. 모든 명사는 단수와 복수, 그리고 성별로 구분하고 동시에 관사의 사용 또한 발달한 것이 서양 언어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 모든 일련의 특성이 바로 개별 인간에게 눈을 돌린 고대 서양 철학에서부터 비롯된 현상이 아닐까. 이처럼 영화는 인간처럼 고유의 이름을 가진 동물과 인간이 부여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동물을 구분한 방식을 통해 앞서 언급한 인간만이 보이는 근원적인 자아 탐색과 확립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일까     


미국 유학 당시 경험한 가장 인상 깊었던 교육 철학 혹은 환경은 나만의 고유한 답을 찾아야 하고 모든 사람의 답은 옳고 그른 가치판단에 앞서 전부 특별하다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가 개봉했던 시기나 십수 년이 흐른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타인의 고유성을 그 자체로 특별하다고 인정하는지에 대해 상당한 의문이 들지만 적어도 당시 학교 내에서는 해당 철학이 적절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서양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공유되는 인간 고유의 특성은 또한 타인과의 관계가 가진 무게일 것이다.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는 모든 동물 중 인간만이 유독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심각성이 크고 더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아를 찾는 굉장히 독특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두 여우의 아들 애쉬를 살펴보자. 초반 등장부터 심상치 않은 이 작은 여우는 아버지인 미스터 폭스에게조차 다르다(different)라고 묘사된다. 해당 장면의 문맥까지 살펴보면 단순히 다른 정도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평범하지 않다고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애쉬의 교내 동급생은 그를 ‘wet sandwich’라고 멸시하는 말을 내뱉는데 이후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키가 작고, 여자처럼 옷을 입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촌 크리스토퍼슨에 비해 외적인 부분, 예컨대 키와 외모 같은 부분에서 떨어지고 운동 신경도 없고 성격조차 괴팍한 애쉬는 남들과 다른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무엇보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점이 불러올 수 있는 부작용을 생각하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영화「사도」에서 묘사된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 간의 관계처럼 말이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쉬는 잃어버린 아버지의 꼬리를 되찾기 위한 위험한 여정을 무단으로 떠난다. 사촌 크리스토퍼슨을 설득해 동행하지만 결국 인간에게 들키게 되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크리스토퍼슨은 붙잡히게 된다. 만약 이 부분에서 미스터 폭스가 애쉬를 질책했다면 애쉬에게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절망이 됐겠지만, 오히려 폭스 부부는 넌 특별하다는 위로와 함께 애쉬를 다독이고, 크리스토퍼슨을 구출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애쉬는 누구도 하지 못한 중요한 역할을 해내며 본인의 가치를 입증하게 된다.      


잠시 시간을 되돌려 보자. 추후에 언급할 인간과의 갈등 및 싸움의 도화선 역할을 한 미스터 폭스에게 부인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의 원망과 질책과 비난이 쏟아지고 조카인 크리스토퍼슨까지 붙잡히는 결과가 발생했을 때, 미스터 폭스가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미스터 폭스의 대사가 인상 깊다. 아들의 특별한 점을 인정해 주지 않았던 미스터 폭스의 고백이 핵심이 되는 장면으로, 다른 동물이 자신을 특별하다고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싫었다는 그의 대사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해의 단초를 얻게 된다. 본인이 특별하게 인정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다른 이의 특별한 점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이 장면만큼 우리 인간의 민낯을 진실되게 보여주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특별한 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일 텐데 우리는 쓸데없이 성별과 직업과 나이를 따져가며 타인의 특별한 점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거부하며 부정하는 세상을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간다. 미스터 폭스가 스스로의 가치만을 우선시하고 우월성을 가지려고 했던 것처럼.   


깨달음은 우여곡절 속에서 태어난다     


초반에 소개한 다섯 가지 질문 중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 질문은 사실상 하나로 꿰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세 명의 인간 농장주와 대립하게 되는 사건은 미스터 폭스가 농장에 침입해 사과주와 칠면조 등 농장주들의 상품을 훔쳐 오는데서 시작한다.


농장주들은 힘을 합쳐 미스터 폭스를 붙잡으려 그의 보금자리를 습격하고 되고 대피하는 과정에서 미스터 폭스는 그의 꼬리를 잃게 된다. 포기를 모르는 농장주들은 나무를 없애고 땅을 폭파하는 수단까지 취해 급기야 여우 가족의 이웃 동물들까지 보금자리를 잃고 도피한다. 그 와중에 아들 애쉬는 사촌 크리스토퍼슨과 미스터 폭스의 꼬리를 되찾으려 사과주 농장주의 집에 잠입하고 꼬리를 찾는 도중 농장주의 부인에게 들켜 크리스토퍼슨은 붙잡히고 애쉬만 가까스로 도망친다.      


두 번째 질문에서 제기한 의문은 도대체 왜 미스터 폭스는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의 농장에서 물건을 훔치려고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영화 끝부터 앞으로 되짚어 오고 있기 때문에 답은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로 인해 타인의 찬사를 받기 위해, 그리고 우월함을 느끼기 위해.      


이 점을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자. 앞서 언급했듯,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탐구한다. 이상적인 체계가 작동한다면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타인과 자신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그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습득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이상과 상당 부분 다르다. 미스터 폭스가 죄 없는 인간에게 피해를 끼쳤듯 인간은 놀랍게도 많은 경우에 타인의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확립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 하여 현실을 전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을 찾고 구할 능력이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 농장주들에 의해 벼랑 끝까지 몰린 동물들은 최후의 반격을 준비한다. 이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한 미스터 폭스의 통솔 아래 세부 계획을 수립하고 병행하여 크리스토퍼슨을 구출하려는 계획까지 세운다. 흥미로운 것은 계획에 따라 역할 분담을 하는 과정에서 미스터 폭스는 각 동물들의 라틴어 이름을 일일이 언급해 주면서도 본인의 라틴어 이름은 말하지 않는다. 아들 애쉬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해 준 미스터 폭스가 마침내 이웃 동물들의 고유 이름까지 언급해 주는 이 장면이 바로 미스터 폭스가 얻은 깨달음이 구현된 장면이라 하겠다.     


이쯤에서 네 번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스터 폭스로 인해 벌어진 모든 소동과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영화 전체에 걸쳐 묘사되는, 미스터 폭스 본인이 가진 이기심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고 잘못을 깨닫고 뉘우쳐 타인을 인정한 뒤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현실에서 매일 벌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다. 옆자리 동료와, 같은 학급 내 동급생과, 같은 집에 사는 가족 구성원과 마찰을 겪고 있다면 미스터 폭스를 떠올려 보자. 그의 회개를 받아준 이웃 동물들의 넉넉함을 마음속에 담아두자. 



꿈은 저 멀리 있어야 한다     


총 세 번에 걸쳐 영화를 보면서 두 번째까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늑대였다. 도대체 이 늑대는 무엇이란 말인가. 왜 미스터 폭스는 늑대를 보며 눈물을 글썽인단 말인가. 해결되지 않는 의문은 두 번째로 영화를 보고 약 삼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해소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가는 지점에서 미스터 폭스와 함께 다시금 늑대를 마주했을 때, 그제야 마침내.     


늑대는 여타 다수의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며 인간처럼 행동하는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옷을 입지 않았고 늑대 본연의 자세, 네 다리를 땅에 딛고 등장한다. 미스터 폭스가 작별 인사를 하며 힘차게 한쪽 팔을 뻗을 때 비슷하게 한쪽 앞다리를 들어준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이 장면을 망설임 없이 꼽겠다. 늑대와 작별하기 전 미스터 폭스는 늑대의 라틴어 이름을 말해주며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본인의 라틴어 이름을 언급하는 이 부분이 바로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미스터 폭스 스스로가 품은 이상적인 자아와 타 동물들과의 관계 속에 자리 잡은 이상적인 자신의 위치가 늑대의 모습으로 발현이 된 것이고, 또한 자신의 라틴어 이름을 소개함으로써 솔직한 현실의 모습을 인정한 미스터 폭스가 늑대의 라틴어 이름을 언급하며 현실의 자신과 이상 속에 형성된 자신이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기쁨과 환희에 벅차 눈물을 글썽이는 미스터 폭스의 모습은, 꿈에서조차 똑같은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질투심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마치며


내가 바라는 내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때로 나 아닌 누군가가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발견한 어느 하루의 나는 때론 기쁨을 때론 질투를 혹은 그 모습을 계속해서 꿈꾸는 어느 밤의 나는 그래서 문제투성이인 현실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미스터 폭스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이웃 동물들이 결국 인간의 슈퍼마켓까지 털어서 살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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