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바닷마을 다이어리」평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가끔 어릴 적 친구들과 나눴던 장난 하나가 떠오른다. 하나에 하나를 더했을 때 둘이 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장난이더랬다. 누군가 사과 하나와 사과 하나를 더해 둘이 됨을 통해 이 공식을 변호할 때 누구는 물방울 하나와 물방울 하나를 더하면 새로운 하나가 됨으로 반박하곤 했다. 누구는 그 역을 들고나왔다. 물방울 하나를 나누면 새로운 하나와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가 맞으며, 둘로 나눈 물방울 중 하나를 없애도 여전히 물방울은 하나이기 때문에 역시나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가 맞다며 강변했다.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장난이 더 이상 어릴 수 없는 지금에도 떠오르는 건, 때로 인생의 어느 한순간을 마주하게 됐을 때 하나 더하기 하나가 혹은 둘 빼기 하나가 꼭 공식대로만 결괏값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혹은 덤덤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인생은 상실과 결핍의 연속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으며 그 안에서 하나를 더해도 하나를 빼도 결과가 항상 같지 않다. 가족 관계가 그렇고 친구 관계가 그렇다. 인간관계라고 범위를 넓혀도 또한 마찬가지다. 외면할 수 없는, 부정할 수 없는, 그래서 함께 안고 살아야 할 이 점을 은은하게 그려내는 작품이 바로 2015년 개봉한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이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작은 바닷가 마을 카마쿠라에서 부모의 보살핌 없이 서로 의지하며 끈끈하게 살아가는 세 자매 사치, 요시노, 치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래전 집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 세 자매는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존재조차 몰랐던 이복 여동생 스즈를 만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맏언니 사치는 스즈에게 불현듯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하고 잠시 망설이던 스즈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세 자매가 사는 집에 스즈가 이사 오는 장면을 지나 영화는 본격적으로 네 자매의 바닷마을 생활을 풀어낸다.
아빠가 없어도, 엄마가 없어도
스즈까지 더해 네 자매가 함께 사는 집은 연식이 꽤 오래된 집으로 묘사된다.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 건물과는 다르게 목재 건축물로 집의 울타리와 현관문까지 목재로 되어 있고 심지어 현관문은 밖에서도 열고 잠글 수 있다. 이 집에서 세 자매가 태어났고 자라났으며 세 자매의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어머니마저 집을 떠났어도 세 자매는 독립하지 않고 이 집을 지키며 살고 있다.
세 자매가 처음 마주한 상실과 결핍이 바로 그들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기능면에서 현대 건축물이 제공하는 많은 기능이 부재한 집이고, 심리적으로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 집은 하나의 완성된 가정이라 부르기 힘들지만 세 자매는 사실상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영화 중반 독립을 언급하며 둘째 요시노는 괜한 투정을 부리고 퉁명스럽게 그러라고 대답하는 첫째 사치의 대화를 보자. 이들의 표정과 표정에서 새어 나오는 진심은 그들의 말과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즉, 부모의 부재를 가진 집이지만 이 집을 나서는 순간 진정한 결핍에 마주하게 될 것을 두 자매는 느끼고 있고, 한집에 모여 사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들이 겪은 상실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또한 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사치가 스즈에게 던진 같이 살자는 제안과 나머지 두 자매의 동의가 만들어진 근거이기도 하다. 만약 세 자매의 아버지의 부고 소식 이전에 셋 중 누군가 독립을 했다면 사치는 스즈를 만났을 때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설혹 똑같은 제안을 해 스즈가 같이 살게 됐더라도 네 자매가 함께하는 진정한 한 가정을 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가슴속엔 큰 구멍을 가지고 산다. 메꿔지지 않는 구멍이.
‘지난 사랑을 잃은 상실의 아픔은 새로운 만남에서 얻을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 살면서 몇 번은 입에 담는 말이지 싶다. 옛 친구들에게서 여러 번 받았던 위로이면서 나 또한 그들에게 건넨 다독임이기도 하다. 과연 성립하는 명제일까. 영화 속 네 자매를 보며 지난날 가졌던 생각을 꺼내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맏언니 사치는 지역 병원의 간호사로서 단호하지만 따뜻하고 보듬는 성격으로 부모의 손길 없이 나머지 동생을 혼자 키워낸 힘을 지니고 있다. 둘째 요시노는 은행원으로 근무하며 쾌활하고 톡톡 튀는 성격과 돋보이는 외모를 가져 연애도 곧잘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셋째 치카의 경우 스포츠 용품점에서 일하고 있고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성향으로 추후 합류하는 스즈와도 금방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일가친척은 고사하고 세 이복 언니와 지내는 막내 스즈는 귀여운 외모와 뛰어난 운동실력으로 전학 간 학급에서 눈도장을 찍고-스즈의 매력에 푹 빠진 남학생은 덤이다-가입한 축구팀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 또한 세 언니가 쏟는 애정과 관심은 실제로도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깊고 넓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상실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네 자매의 등 뒤로 드리운 그림자처럼 말이다. 사치는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유부남 의사와 사랑에 빠진 상간녀를 자초하지만 정작 의사의 본처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상황에 처해 있고, 둘째 요시노는 금전적으로 남자에게 뒤통수 맞기 일쑤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셋째 치카는 다소 현실감각이 부족해 보이는 미성숙함을 보이고 두 언니에 비해 부모와의 추억이 거의 없다.
막내 스즈는 어떠한가. 친부모는 전부 사망했으며, 심지어 아버지에게 자신은 첫 자녀가 아니다. 때로 아버지가 그립지만 그가 남겨둔 원죄의 무게에 짓눌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세 언니의 눈치를 보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상실과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
베인 상처 위에는 딱지가 앉기 마련이고 딱지가 떨어질 때쯤에는 새살이 돋아나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상처를 입었다는 기억까지 사라질 것인가. 서두에 언급했듯 떠나간 사랑의 흔적 위에 새로운 사랑을 피워낸다 한들 추억 속에 자리 잡은 흔적을 지울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한번 생겨난 상실과 결핍은 혹은 그것이 할퀴고 간 자국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보듬고 가야 할 상처이고 기억이며 추억인 동시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실인 것이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에서 암시나 상황 설명이 아닌 네 자매가 직접 겪는 상실의 순간이 두 번 찾아온다. 첫 번째는 네 자매의 맏이인 사치에게 먼저 벌어진다. 사치와 내연 관계에 있는 유부남 의사는 본처와 이혼 후 미국으로 연수를 떠날 것이라며 사치에게 같이 떠나자는 말을 건넨다. 사치가 의사를 택한다면 사랑을 얻지만 현재 직업과 남은 동생들을 잃게 되고, 현재를 선택하면 사랑하는 남자를 잃게 된다.
두 번째는 네 자매의 단골 식당 주인인 사치코 아주머니와 관련이 있다. 스즈를 제외한 세 자매의 어린 시절부터 식당을 운영한 사치코 아주머니는 갑작스러운 증상으로 병원에 내원했으나 진단 결과 이미 때를 놓쳐버렸고 결국 잠깐의 허락된 시간이 끝난 후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사치, 요시노, 치카 세 자매는 스즈라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다. 부모를 잃었지만 친혈육보다 더 따뜻한 세 언니를 얻게 된 스즈가 있다. 마을에 남기로 결정한 사치는 사랑을 잃었으나 새로 생긴 막냇동생을 비롯한 현재의 행복을 유지한다.
사치코 아주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바닷가로 걸어간 네 자매 앞에 펼쳐진 바다와 파도와 수평선과 하늘은 은은히 빛나며 상실의 슬픔을 차분히 덜어낸다.
그렇다. 올해 나무에서 직접 딴 매실은 주방 바닥 아래 조용히 아름다운 빛깔의 음료가 되고 술이 되고 내년이 되면 매실나무에는 다시 매실이 열리는 것처럼. 바닷가 작은 마을에 새겨진 매일의 일기는 펼치는 이에게 속삭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