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동
호야가 말했다. “나, 피아노 안 칠 거야.” 아이가 피아노를 그만 배우고 싶다고 했다. 피아노 선생님 말씀이 한 달 전부터 연습실에 와서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고 했다. 피아노 선생님에게 ‘그럼 뭐해요?’ 하고 물었다. 아이가 음악 이론 책에 색칠하기는 한다고 했다.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으니 선생님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단 아이와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지난 상황을 생각하니 당황스러웠다. 피아노는 계속할 거로 생각했는데….
지난 일 년 반 동안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성당에 다니는데 아이의 피아노 선생님은 나의 대모님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유치원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풀 배터리 검사를 했다. 결과는 검사의 모든 영역에서 검사 수치가 낮게 나오는 경계선 지능이었다. 당시 나는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전임의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아이의 풀 배터리 검사지를 받고 많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저녁에 동료들이 퇴근하고 나면 전임의들이 쓰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 경계선 지능에 대한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보곤 했다. 하루는 저녁 시간에 비대면 성당 공동체 모임이 있어 사무실에서 참석했다. 마음에 와닿는 성경 말씀을 나누는 시간에 본인의 근황도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날은 아이의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컴퓨터 화면 속에 있었지만,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수년간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었다.
얼마 뒤에 대모님에게 전화가 왔다. 대모님은 음악 전공자로 개인 지도를 주로 하는데 조금 특별한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나름의 기술이 있다고 했다. 아이를 연습실로 데려와 보라고 했다. 연습실은 집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이전에도 방문 피아노 수업을 하다가 아이가 싫어해서 그만둔 적이 있어서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가 피아노 선생님을 아주 좋아했다. 내가 보기에 대모님은 아이를 자연스럽게 대하면서도 교육도 효과적으로 하는 소위 밀고 당기기를 잘하시는 분이었다. 느린 학습자의 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학습심리라고 한다. 따라서 선생님의 실력이 얼마나 우수한가는 큰 의미가 없고 아이가 선생님을 좋아하고 신뢰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 후 매주 토요일이면 호야와 민이를 데리고 점심때쯤 피아노 연습실에 갔다. 처음에는 택시를 타고 가서 호야가 개인 지도받는 동안 나는 민이를 데리고 근처에서 기다렸다. 호야가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을 때는 나도 아이가 진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울감이 심했다. 대모님은 아이 지도하는 동안 나는 근처 카페도 가서 쉬라고 하셨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평일에는 내가 근무하느라 두 아이를 시어머님께서 보시니 주말까지 아이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 지난 어느 날 호야가 피아노 연습실에 지상철을 타고 가면 안 되냐고 물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지상에 고가 위로 다니는 모노레일이 있다. 아이가 차 타고 다니면서 본 모양이었다. 공중으로 다니는 모노레일을 타면 아이들은 마치 놀이기구 탄 듯 즐거워한다. 시내 여행하는 셈 치고 아이들과 함께 지상철을 타보기로 했다. 이날 피아노 수업이 끝나고 연습실에 상담하러 가니 대모님이 활짝 핀 얼굴로 놀라움을 표시한다. 호야가 갑자기 악보를 읽는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소귀에 경 읽기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호야의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면서 일종의 음악치료라고 생각해 진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날 호야가 버스, 지상철을 타고 가서 기분이 아주 좋았고 또 그동안 선생님과 관계가 돈독해져서 그동안의 수업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느린 아이들의 배움에 정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책 한 권이 끝나면 선생님과 아이가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먹기도 하고 즐겁게 피아노 수업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번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호야는 다시는 자동차를 타고 피아노 연습실에 가지 않으려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 둘을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연습실에 가자니 나로서는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힘들지만 그래도 아이가 좋아하니 가능한 한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호야가 피아노 교습을 마치고 나오다가 다음 시간에 수업하는 고등학생 형과 마주쳤다. 그 학생 인상이 아이로서는 매우 무서웠나 보다. 선생님 말으로는 아이가 기겁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그 형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수업 시작 시각이 늦어지면 아이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생님이 그 형과 절대 안 마주칠 거라고 약속하셨는데 소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양손 피아노 치기를 시작하면서는 피아노의 어려움이 온갖 간식, 라면, 대중교통 이용을 상쇄하는 모양이었다.
감정코칭을 배웠으니 그냥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아 아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나: “호야, 피아노 치는 거 어려워?”
아이: “응, 피아노 안 칠 거야.”
나: “언제부터 피아노 치는 게 힘들었어?”
아이: “….”
나: “선생님이랑 피아노 배우는 거 쉴까?”
아이: “응, 그만할 거야.”
나: “피아노 안 하면 지상철 타는 거 못하는데 괜찮아?”
아이: “그만할 거야.”
나: “그래 피아노가 힘들었구나, 그럼 피아노는 당분간 쉬기로 하자.”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피아노를 그만하고 싶다는 의사는 파악했다. 감정코칭에서 이야기하는 바람직한 대화로는 연결이 안 되었다. 할 수 없이 선생님께 연락해서 그만하겠다고 했다. 일 년 반 정도 피아노를 배웠는데 덕분에 아이가 쉬운 악보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감정코칭 부모교육 강의 시간에 이 이야기를 했다. 강사님이 그 나이대 남자아이들은 원래 피아노를 어려워한다고 했다. 강사님은 아이에게 상황을 잘 들어주고 물어봐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호야는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사건 이후로 아이는 내가 자기 의견을 어느 정도는 존중해 준다고 느끼는 것 같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나에게 한마디 정도 말을 하기도 한다. 아이와 나 사이에 이전에는 희미했던 신뢰가 조금은 두터워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