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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아나의 행복일기 Mar 11. 2024

모든 가족에는 검은 양이 있다

  우리 집의 검은 양은 도련님이다. 

“도련님, 제가 알아서 먹을 테니 그냥 두세요.” 앗, 냉랭한 어조의 말이 나와 버렸다. 

“형수님, 이 샐러드 좀 가져다 드세요”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손에 토마토소스를 묻혀가며 민이에게 줄 왕새우 껍질을 까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냥 애매모호하게 ‘네’라고 할걸, 내가 왜 그랬지?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대실수다. 내가 이런 사소한 간섭을 아주 싫어한다는 것을 도련님은 왜 모르는 걸까? 불가사의하다. 그동안 자기표현을 너무 안 했나 보다. 가까이 사시는 시외숙부님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였다. 시외숙부님은 시어머님과 우리 가족을 알뜰살뜰 챙기신다. 이날은 서울에 있는 남편 사촌형 가족도 함께였다. 남편은 어른들과 앉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도련님 앞에 앉았다. 그런데 식사 초반부터 도련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계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가 한다. 내 옆자리에 앉은 민이는 피곤한지 계속 나에게 비비적거리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호야는 남편 사촌 형 아들에게 ‘여기서 너희 집이 더 멀어, 우리 집이 더 멀어?’하며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리 배치가 잘못되었다. 도련님 가까운 곳에 앉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들 우왕좌왕하다 보니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다음부터는 도련님이 잠잠해졌다. 새해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난처하다.   

   

연례행사

 다시 보니 도련님은 이번 겨울에 평소와 뭔가 달라 보였다. 도련님의 몸짓과 말투에서 초조함과 불만이 느껴졌는데 이런 작은 점들이 나의 긴 더듬이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우리 도련님은 자칭 주식 시장의 고수이다. 국내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여 멋지게 성공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수년째 좇고 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매년 치르고 있는데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시댁 식구 중 아무도 그의 성적표를 본 일이 없으며 대학에 입학원서를 낸 지 아주 오래되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평소에는 서울에 있는 고시촌에서 지내는데 연말에는 시댁에 와서 한 해 동안 쌓인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고 간다. 시댁 앞 동에 사는 나의 스트레스도 이 시기가 되면 절정에 이르며 매년 긴장도가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평소보다 더 어리게 행동하며, 어머님은 타지에서 온 막내아들을 위해 하루 삼씨 세끼를 해내느라 버거워하시고, 남편은 매년 신경이 조금씩 더 곤두서는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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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후에 수년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집에 도련님과 시어머니를 초대해서 저녁을 함께 먹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로서는 가톨릭 신자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 성탄전야 미사를 빠지고 비신자 가족을 위한 저녁을 준비했으니 큰 배려를 한 셈이다. 마음 한편에는 따뜻한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면 도련님이 언젠가는 헛소리 그만하고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연말에는 시댁 식구들과 함께 1박 2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갔다. 하지만 몇 년간 보아하니 우리 부부의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은커녕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듯하다. 본인이 노력해서 현재 상황을 바꾸려는 마음 자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작년에는 보다 못한 내가 지금 세상은 학력, 출신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mkyu를 소개해 주었다. 정신 차리라고 왕 짹짹이 인형도 보내줬는데 도련님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나이가 들자, 타지 생활도 신물이 나는지 작년에는 시댁으로 다시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 어머님은 당신 막내아들은 멀리 있으면 애처롭지만 가까이 있으면 일상의 평온함이 깨진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어머님께서 집에 들어오려면 취직해야 한다며 도련님을 막으셨다. 이 결정에는 내가 일조했다. 


 작년 새해 첫날에 시댁 식구들과 울산에 여행 갔다. 내가 운전하는 차에 어머님 혼자 타시게 되었는데 이때다 싶어 속 얘기를 털어놓았다. 도련님이 집에 내려오면 내가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도련님은 심리상담을 받아야 한다, 아이들은 점점 크는데 본이 되지는 못할망정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아 많이 신경 쓰인다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되어가고 매년 같은 패턴이 반복되니 나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님은 ‘그럼 어쩌란 말인데’ 하며 당황해하셨는데 그 이후로 도련님을 좀 자제시키려는 노력이 보인다. 돼지 코에 진주 목걸이라고 더 이상 소중한 성탄절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대학 친구들이 크리스마스에 가족 단위로 전주 한옥마을로 놀러 가자고 했다. 성당이 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아이들끼리 어울릴 좋은 기회인 것 같아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카들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던 도련님은 많이 섭섭해했다. 

     

변화가 필요해

 도련님이 툭툭 말을 뱉는 모양새가 아주 꼴사납다. 시간이 갈수록 도련님 꼴 보기가 점점 싫어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는 걸까? 아이들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며칠 전 눈치 빠른 민이가 ‘삼촌은 집에서 돈 벌어’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만약 ‘삼촌은 무슨 일 해?’하고 물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민이는 벌써 눈치챘구나. 머리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 띵하다. 그렇지 않아도 느린학습자들은 성인이 되면 은둔형 외톨이로 가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인 환경도 그런데 바로 옆에서 직접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니, 그것도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삼촌이, 이것이 내가 열받는 이유이다. 작년에는 고민이 많이 되어 심리상담소에 도련님 현재 상황을 적어서 메일도 보내 보았다. 답 메일이 왔는데 본인이 의지가 없으면 상담이 별로 효과 없다는 내용이었다. 


 도련님은 어쩌다 가족들까지 부담스러워하는 괴물이 되었을까? 지금은 많이 녹이 슬었지만 대화할 때 보면 나름의 유머 감각과 재치까지 있어 솔직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도련님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시아버님께서 뇌암으로 수술받으셨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잠깐은 활동하셨지만 얼마 뒤에 뇌전증으로 쓰러지셔서 십여 년간 병상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지만,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못 하셨고 어머님은 병상에 계신 아버님 돌보시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하셨다. 이런 환경이었으니 도련님이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제대로 못 받았을 것이다. 거기다 한 살 위인 공부 잘하는 모범생형과는 어머님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계속 비교당했다. 도련님을 보면 피해 의식이 대단히 크고 일부러 본인이 편하기 위해 아이로 머물려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한마디로 심리 치료의 대상이다. 


 아직 미혼이고 절약 정신이 투철하니 기본소득이니 뭐니 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려할 때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손 안 대고 코 풀기’ 정신이다. 뭐든 남의 것은 좋아 보이는데, 대가나 노력 없이 차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지나치다. 형 가족의 단란함은 부러우나 본인이 노력해서 가정을 일굴 생각은 없고 그저 숟가락만 슬쩍 얹고 싶어 한다. 시댁에 내려오면 아이들에게 곧잘 하는 질문이 ‘아빠가 좋아, 삼촌이 좋아’, ‘엄마가 좋아, 삼촌이 좋아’다. 만만한 호야는 이제껏 삼촌 구미대로 대답해 주었지만, 눈치 빠른 민이는 어림없다. 한번은 이 질문이 너무 듣기 싫어 내가 대놓고 정색을 한 적도 있는데 별 소용 없었다. 뭐든 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할 텐데 과정에는 관심 없고 화려하게 보이는 결과물만 단숨에 차지하고 싶어 한다. 이런 건강하지 않은 마음 자세가 나는 영 마땅치 않다. 이런 태도를 아이들이 배울까 고민이 깊어진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오랜만에 아파트 뒷길을 조깅하는데 나무 몸통 위로 지난겨울에 보지 못했던 연두색 가지들이 쭉쭉 솟아 나와 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무인데 파릇파릇한 가지들이 나도 살아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무는 긴 겨울 동안 봄을 준비하며 새 가지를 세상에 내놓으려고 끊임없이 준비했다. 길가의 나무들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부단히 움직이는데 우리 검은 양 도련님은 왜 계속 제자리에 있는 걸까? 도련님은 이제 갓 마흔을 넘겼다. 이대로 계속 가면 분명히 결말이 안 좋을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텐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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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니, 도련님의 인생 곡선은 우하향 곡선으로 진행 중이다. 어머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올해부터 일단 매일 아침 도련님을 생각하며 ‘비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기로 했다. ‘우리 도련님이 자신의 동굴에서 나와 남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살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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