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썸머라는 말이 있다.
이는 북미 지역에서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10월 말에서 11월)에 - 엄밀히 서리가 내린 후 - 갑자기 여름처럼 더워지는 날들이 며칠을 일컫는 말이다. 가을 속의 여름인 (Summer in Autumn)인셈이다. 이는 학술적이거나, 일종의 날씨를 언급하는 데 있어 정식 용어는 아니다. 그냥 여름이 완전히 지났다고 생각되는 10월부터 갑자기 더워지면 흔히 '인디언 썸머'로 칭한다.
이 말은 실제로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으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인생의 절정기를 넘은 상황에서 우연히 다가온 기회, 사랑 그런 것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힘든 상황에서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희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전에 이미연 씨가 주연한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자 사형수가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죄로 선고받았으나, 재판과정상의 문제로 다시 재판을 받아야 했고 다시 사형수로 되돌아갔던 내용이었던 같다. 사형수에서 벗어난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추운 가운데 짧은 따뜻한 날을 보낼 수 있었던 인디언 썸머와 같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지난 7월에 머세드에서 샌프란시스코에 붙어있는 콜마라는 도시로 이사를 왔다. 맨 처음 와서 놀란 것은 날씨였다. 7월인데 밤에 창문을 열면 추웠다. 실제로 사람들이 보통 두꺼운 후드티를 입고 다니고 있었다. '어머나, 이런 데서 어떻게 사나?'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이 날씨의 매력에 홀딱 빠졌다. 햇살은 빛나면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냥 반팔에 두꺼운 옷을 하나만 준비해 두면 된다. 익숙한 사람들은 반팔티에서 후드로 왔다 갔다 하면 한 없이 이 도시의 최고의 매력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 겨울을 안 살아 보았으니 단언은 못 하겠지만 1년 동안 날씨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에어컨이 없는 집들이 많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거실에 작고 오래된 에어컨 겸 히터가 있을 뿐이다. 한 번 켰다가 하도 시끄러워서 다시는 켜지 않는다. 아니 켤 필요가 없었다.
아침이면 바닷가 쪽 언덕에서는 늘 안개가 끼어있다. 그리고 고도가 낮은 쪽에서는 햇살이 반짝이고 있다. 나는 조금 먼 곳에서 발코니에서 그 경치를 즐기며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다. 날씨 하나로 일상을 여행을 하는 느낌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0월이 되자마자 더위를 조심하라는 문자가 왔다. 보통 최고기온이 화씨로 70도 (섭씨 20도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던 날씨가 100도(섭씨 35도 수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반팔에 반 바지를 입고서도 더워했다. 더위에 민감한 사람들은 에어컨을 사러 갔다. 순간 나는 "야! 이게 말로만 듣던 인디언 서머이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인디언썸머는 샌프란시스코 같은 바닷가 날씨에는 적용하기는 힘든 단어이다. 주로 미국 북쪽이나 캐나다 같은 곳, 그리고 산이 깊은 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내가 경험하는 이 갑작스러운 더위는 fake 인디언 썸머일지도 모른다.
이 단어가 나를 끌어당긴 것은 현재 내가 인생의 인디언 썸머를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방끈에 제법 긴 내가 이번 가을부터 또 공부를 시작했다. 말이 공부이지 취미생활이다. 미국에서는 카운티 별로 커뮤니티 칼리지가 있다. 2년제 대학이고 수업료가 일반 대학에 비해 매우 저렴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은 보통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하기 위해 많이 듣는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교실처럼 나이 불문하고 주민들도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수업료는 카운티마다 다르다. 내가 사는 곳은 샌 마태오 (San Mateo) 카운티인데 여기는 올해부터 학위를 위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수업료가 무료이다. 그리고 자기 계발을 위해 수강하는 경우 학점당 48불 정도만 내면 된다. 캠퍼스가 세 군데나 있어 우리 집에서 10분, 30분 정도, 40분 거리에 나란히 있다. 나름의 편리성을 고려하려 강의를 신청하면 된다.
원래 나는 노래 부르는 것에 관심이 많아 2학점짜리 vocal수업을 들으려고 했다. 상담하러 학교에 갔더니 직원이 학위를 목표로 해보라고 권장한다. 그리고 그 뒤에 유혹의 말을 덧 붙인다. 그러면 공짜라고. 그리고 그 뒤에 또 한마디 했는데 그것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 학기 6학점이상 들어야 한다고. 그 자리에서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추가로 등록하고 말았다. 지금 정신 차려 생각해 보니 그 직원은 아마 학생을 많이 입학시키는 것이 업적평가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직원은 아시안 아줌마들의 속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걱정도 많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수업이 너무 재미있다. 아무래도 실습과 performance 위주이다 보니 이전과 나의 공부방식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흥미롭다. 그리고 내가 국민학교 때 몇 개월 배우다 만 피아노 강습 때 배웠던 이론과 기술이 너무나도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즈음은 아침에 일어나면 유튜브에 있는 클립으로 보이스 Warm-up를 한다. 내 생활의 가장 큰 변화이다. Vocal 교수님의 수업은 거의 학생과 교수가 같이 뮤지컬을 하는 느낌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영역을 탐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람의 삶 또한 와인처럼, 음미할 수 있는 깊이를 가진 그 무엇임을 알아가는 중인 것 같다.
비록 fake 인디언 썸머라 할지라도 좀 더 길게 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