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저녁을 준비하다가 파가 필요해서 텃밭으로 나갔다. 파를 잘라서 한 움큼 손에 잡고 보니 일어나다가 파슬리도 좀 잘라가야겠다고 눈을 텃밭의 가운데로 돌리는데 바닥에 회색과 검은색의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새가 죽어 있었다. 순간, 나는 무언가 심장이 쿵하며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은 충격이 왔다. 아무리 작아도 시체는 시체이다. 마구 뛰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그 와중에 파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저녁 식사도중 현재 내가 앉아 있는 식탁이 기대고 있는 이 벽 너머에 새가 죽어있다는 것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면 더욱 코끼리만 생각난다고 ' 지금은 어두워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일단 먹고 나서 생각하자'하고 마음을 달랬는데도 자꾸 땅 위에 누워있던 그 새가 생각이 나서 밥맛을 잃었다.
아마 고양이의 공격을 받았나 보다. 생각해 보니 오래전에, 애리조나에서도, 거실의 유리창 커튼을 걷고 있는데 고양이가 새를 공격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제일 먼저 한 일은 아이들 눈을 가리는 것이었다. 아파트 관리인에게 전화해서 그가 치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녁에 자리에 누우니 그 새가 고양이의 공격을 받는 장면부터 눈앞에 그려진다. 한번 시작된 과거에의 연상은 더욱더 오래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갑자기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서 복녀의 죽음이 생각났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돈 거래하는 왕서방 밖에는 없었다. 내 텃밭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이 끊어진 자그마한 새의 주변에는 떼 지어 몰려드는 개미들 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애도를 하지 않는 죽음. 너무 슬프다. 내가 사랑하는 뒤뜰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모종삽을 들고 그 새의 주검 앞에 섰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은 더위에 노랗게 변한 잔디 쪽 (사실은 잡초가 더 많다)으로 옮겼다. 캘리포니아는 매우 건조한 지역이라 물 사용에 매우 엄격하다. 특히 머세드와 같은 내륙의 도시는 더욱 그렇다. 덮고 건조한 이 곳에서 여름에 잔디에 물을 주며 키울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땅이 딱딱하다. 땅을 파려고 하니 도저히 내 힘으로는 힘들다. 더구나 며칠 전 손목을 다쳐서 손에 힘을 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땅 위에 놓고 주변에 있는 큰 잡초를 뽑아서 그 위에 덮었다. 잔디는 완전히 누렇게 되었는데 잡초들은 8월까지는 푸르름을 자랑한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그리고 큰 놈일 수록 가시로 자신을 무장한다. 힘들게 잡초를 최대한 뽑아서 그/그녀를 덮어주었다. (영정) 사진을 찍고, 그/그녀 (새도 LGBTQ+ 가 있으려나?)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 수고했다 아가야, 네 영혼은 멀리멀리 날아가길..." 크기로는 그/그녀가 아기였는지, 어른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두 아기였다. 서른 살이 넘은 딸에게 가끔 '아가야'란 소리가 저절로 나오듯이.
새의 죽음 앞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살았던 사실을 재확인하였다. 나의 삶은 유한하다. 그리고 그게 언제 끝날지 모른다. 오늘일 수도 있다. 우리가 울고 웃고 미워하던 모든 일들이 얼마나 허무한가? 이 작은 존재의 죽음의 여파는 강한 파장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인간의 죽음, 혹은 인간의 유한성의 수용은 큰 숙제이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과제이다. 얼마나 더 겸손해야 이것을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외쳤다. "Thanks God. I'm still alive" 그래! 이렇게 가볍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