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을 먹기 위해

-잠시 앉는다.

by 개나리


“인간은 음식 말고도 공기와 풍경도 먹어요”

인간극장 中 <날마다 소풍> 편에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온 광식 씨가 한 말이다.

공기와 풍경을 먹다니! 실로 자연은 인간의 육체의 유지와 마음의 생존을 위한 것들까지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제한된 시간 안에 맘껏 쓸 수 있는 ‘제주패스’는 아껴야 하는 여행자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상품이었다. 24시간, 혹은 48시간 동안 마음껏 제주의 여행지를 무료로, 혹은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하루에 두세 군데만 가도 본전보다 이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다! 제주에 사는 동안 늘 아껴야 했기에 잘 가보지 못했던 곳이 많았던 터라 이 때다! 싶어 무리해서 하루에 6~7군데를 바쁘게 움직인 것이 문제였다. 잔뜩 욕심부리며 다음 여행지를 생각하며 다니다 보니 에너지가 빠르게 소진되었다. 마음은 계속해서 다음 여행지를 재촉하며 빠른 걸음으로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그러다 아차 하는 순간이 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쏜살같이 다음 여행지를 향해 가던 마음을 그만 두기로 결정하고 잠시 앉았다.

앉으니 바쁘게 나갔던 마음이 서서히 몸에게 돌아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처음 보는 제주의 작은 노랑새(나중에 찾아보니 노랑할미새라고), 삼나무의 맑은 녹음과 시원한 향.

그곳에서 공기를 천천히 마시고 내쉬며 머물렀다.

그제야 내가 그 장소에 있었고 오랜만에 몸과 함께 마음이 숨 쉬었다.

그때부터 생긴 나만의 작은 행동 수칙 하나
<잠시 앉는다>


그리고 천천히 그곳의 일부가 되어 공기와 풍경을 먹는다.

나의 정규앨범 <제주의 밤> 중 ‘우아우아’에 이런 가사를 썼었다.


오늘은 어딜 갈까 사뿐히 걸어서

사려니 숲가서 시원한 공기나 마실까

우아우아우아 우 기분 좋아

한 걸음씩 걷다 걷다 목이 마르면

물영아리 오름에 올라 물이나 달랄까

우아우아우아 우 맛이 좋아


‘우아우아’는 우아(優雅),즉 ‘소박하지만 기품 있고 아름답다’라는 뜻과 함께 제주의 신선한 공기와 풍경을 입을 크게 벌려 우~아하고 먹으러 다니는 다소 원초적인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제주에 와서 도시에서는 잘 챙겨 먹기 힘들었던 공기와 풍경을 배불리 먹기 위해 시간이 날 때면 자연으로 노다녔다. 가사에는 사려니 숲을 적었지만 막상 제주에 살면서는 ‘사려니숲’보다는 바로 옆의 (차로 2분 정도)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을 더 자주 갔다.

(비 온 뒤에 특히 운치 있는 사려니숲도 우아하지만 붉은오름 자연 휴양림은 사람들이 적어 훨씬 여유롭다)


숲에 갈 때는 세상 편한 옷을 입고 간다. 그리고 접으면 손바닥 크기인 가벼운 방석을 가져간다. 한적한 평상을 만나면 잠시 앉아 천천히 숨을 쉬며 숲의 움직임이 느껴본다.


숲은 지나갈 때와 잠시 멈춰 있을 때가 다르게 보이고,

서 있을 때와 앉을 때,

앉을 때와 누울 때가 또 다르게 보인다.

가만히 멈추어 숲과 호흡을 맞추다 보면 나무와 나무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때다! 역시나 우아우아 크게 숨 쉬며 공기를 맘껏 먹는다.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이 풍경들의 맛은 때에 따라 참 다양한데 나는 나뭇잎 윤슬이 여린 햇빛과 함께 막 흐르기 시작한 때의 살짝 서늘한 아침 공기의 맛을 특히 좋아한다.

숲 속의 다양한 나무들을 한참 눈에 담다 보면 눈이 좋아하는 게 느껴진다. 새삼 내가 그동안 눈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눈을 뜨자마자 기계화면을 쑤셔 넣은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 일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 뒤, 눈에게 항상 친절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컴퓨터나 휴대폰 화면을 눈 뜨자마자 넣지 않으려 했다. 가끔은 다락방에 올라가 창문을 열고 아침의 공기를 마시며 눈과 코 그리고 마음에게 좋은 것들을 먹이려는 의도를 발휘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새로 생긴 아침의 습관은 숲에 자주 다녀 받게 된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숲이 참 좋다.

숲에 가면 적당한 때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잠시 앉는다.

눈도 콧구멍도 혀도 귀도 피부도 제 각기 숨 쉬며 자연을 흠뻑 흠향한다.

서서히 숲이 내 몸에 흐른다.




덧: 제주패스를 쓸 때는 우리, 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여유롭게 다니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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