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갑자기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때워야 할 일이 생겼다.
만만한 게 카페인데 가서 할 일이 없었다. 스마트폰을 보면 되지만 아침부터 이미 몇시간을 들여다 본 상태라 액정만 생각해도 메스꺼워졌다. 선택지가 많지 않다. 폰이 아니면 책인데 다행히 내가 있던 곳 근처에 서점이 있었다. 당장 달려가지 않고 망설인 이유는 집에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많아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중 하나 들고 나오는 건데. 그것들을 놔두고 또 책을 사기가 아까웠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일단 들어갔다.
작은 서점이기에 거기서 두 시간동안 책을 보며 서 있기도 여의치 않다. 결국 사기로 했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은 당장 없다. 새로운 책을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책꽂이를 뒤졌다.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작고 얇고 쌈박한 게 없을까 하며 계속 뒤졌다. 작고 얇진 않았지만 흥미를 끌만한 소설책들이 몇 권 있었다. 그런데 너무 크고 두꺼웠다. 가격을 보니 하나같이 만 칠팔천원. 요즘 책값 왜이렇게 비싼거냐. 하긴 뭐든 다 올랐는데 책이라고 뒤질 수 없지. 그중 하나를 사야겠다. 근데 결정장애가 생긴다. 이거다 싶은 게 없다보니 뭘 골라도 후회할 것 같다. 그래서 시험삼아 첫 페이지들을 읽어봤다. 다 고만고만하다. 그렇게 결정장애가 이어진다.
그러다 무심히 잡지 코너를 훑어봤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1월호. 개인적으로 저 잡지를 한참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직도 발행되고 있다는 게 기특했다. 옛날보다 훨씬 작아졌고 얇아졌다. 카페에서 뒤적이며 시간을 때우기에 너무 완벽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9500원입니다”라는 계산대 직원의 말에 순간 아득해졌다. 이 조그맣고 가녀린 발행물이 그 가격이라고? 사긴 샀지만 그걸 들고 카페로 들어가는 내 마음이 무거웠다. 책을 고르느라 이미 30분 가량을 소비했으니 남은 시간도 많지 않다. 난 주문을 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잡지를 노려보았다. 그래, 내 너를 씹어먹어주마. 영어사전마냥 한줄 한줄 잘근잘근. 그놈의 가격 때문에 장고 끝에 악수가 되어버린 내 선택에 대한 애처로운 보상심리였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내셔널지오그래픽 CEO가 쓴 머리말인지 덕담인지가 있었다. 최고책임자 답게 말세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여러 환경운동가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멸종위기종 플로리다메뚜기참새의 개체수가 증가했댄다. 사진을 보니 한국의 참새보다 다리가 조금 길고 꼬리도 좀 길다. 그 밖엔 모르겠다. 많이 달라보이진 않지만 그냥 참새와도 다르고 그냥 메뚜기참새와도 다르댄다. 저런 식의 무한 분류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무식한 죄로 참는다. 어쨌든 얼마 전까지 100마리도 안되던 귀한 플로리다메뚜기참새가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100마리가 넘었댄다.
기분 좋은 소식이긴 했다. 게다가 정보를 독점했다는 흐뭇함도 생겼다. 타인들은 굳이 원하지 않는 정보지만 상관없다. 지금 내 시야에 보이는 수백 명의 도시인 중 플로리다메뚜기참새를 아는 자는 나 뿐이니까. 아마도.
“저기.. 실례합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구요, 혹시 플로리다메뚜기참새라고 아세요? 당연히 모르시겠죠. 얘네가 멸종위기 1급인데 최근 환경운동가들의 노력으로 개체수가 두 자리에서 세 자리로 증가했대요. 세상 아직 살만하지 않습니까? 아.. 관심없다구요.. 예? 아... 저 이상한 사람 맞다구요?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실례했습니다.”
물론 가상의 대화다. 누군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내 얘기를 경청한다면 그 역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공유에의 욕구란 무책임하게도 원초적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운 인문학적 깨달음과 어떻게 비벼볼 수도 없는 파편적 정보라 더욱 그렇다. (괜히 가만히 있는 플로리다메뚜기참새에게 미안해진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많은 사람들이 다들 비슷한 본능들을 누르고 안 그런 척 바삐 지나간다. 어쩌면 속으로 나처럼 가상의 공유를 하고 있을 수도. 슬프지만 그 슬픈 질서를 깬다고 기쁨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혼자 삼킨다. 나도. 저들도.
추억의 잡지 첫 페이지를 달랑 읽고 상념에 좀 빠지니 시간이 됐다.
자신의 이름이 플로리다메뚜기참새인지 모르는 플로리다메뚜기참새의 건투를 빈다.
(명복을 빈다라고 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