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휴대폰이 울린다. 액정에 뜬 ‘발신표시 제한’이 그녀의 불안을 부추긴다.
“당신의 아이를 데리고 있다. 지금부터 정확히 24시간 후에 영동 고속도로 여주 휴게소에서 접선한다. 돈은 아이의 교환가치를 판단해서 성의껏 현찰로 준비하라.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혼자 올 것. 휴게소 전후 1km 지점에 사람을 배치했다. 만일 약속한 시간에 그 구간에서 공권력이 발견될 시, 그리고 약속을 어기거나 단 1분이라도 지각할 시, 혹은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될 시 협상은 종료되고 아이는 고인이 되어 귀댁에 택배로 배달될 것이다. 그럼 목소리를 들려주지. 엄마~! 딸깍.”
패닉에 빠진 아이 엄마는 일단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한바탕 눈물을 쏟고는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집안을 방황한다. 천지신명께 빌고 빌어 결혼 6년만에 가까스로 가졌던 내 아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아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끔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나는 내 아이, 오냐오냐 키우고 있지만 안하무인하지 않고 어디서나 귀여움을 받는 내 아이, 장차 세상의 빛이 될 내 아이.. 등등의 도움 안되는 생각만 하며 30분을 날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녀는 실내 원운동을 중지하고 행동을 개시한다. 전남편, 지인들, 혹은 경찰에게 연락? 지금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유괴범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자살행위, 무섭지만 혼자 해결해야 한다. 그럼 뭘 해야 하지? 돈을 마련해야지. 그녀는 초인적인 속도로 예금 적금 보험을 깨고 10여 통의 전화를 돌려 지인들에게서 푼돈을 빌리고 빠른 인터넷 대출도 받는다. 20시간 정도가 흐른 상황에서 2천 8백만원이 모였다. 하지만 유괴범이 정확한 액수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게 걸린다. 성의껏이라니? 현재 성의는 무섭도록 넘친다. 그러나 아이의 교환가치로는 28억이라도 모자란다..... 그럼 어떡하지? 아차, 빨간 스카프도 구해야 한다.
남은 시간은 한시간 반 가량. 신갈 IC에서 영동 고속도로로 진입, 전속력으로 한시간을 달렸다. 이천을 지나 '여주휴게소 1km' 예고판이 보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갓길에 주차되어 있는 경찰차! 그녀는 생각할 겨를 없이 브레이크를 밟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저들은 이 사건과 관련없는 그냥 경찰일 것이다. 하지만 유괴범은 분명히 지금 상황을 경고했다. 어떻게든 저들을 1km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근처에 대형사고가 났다고 허위신고를 할까? 그러면 저들은 무전으로 다른 경찰에 연락을 할 것이고 허위신고라는 게 금새 들통날 것이다. 저 차를 들이받고 멀리 유인한 뒤 다시 돌아올까? 얼마 못 가 잡힐 게 뻔하고 그렇지 않다 해도 약속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이다. 사실대로 고백하고 도움을 청할까? 고백하려면 진작에 했어야 했다. 지금은 최악의 타이밍이다. 아아.. 뭐든 해야 한다. 아이를 무사히 찾을 수만 있다면 서울역 광장에서 벌거벗고 춤을 출 수도 있고 청계천을 수영으로 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은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불과 10여 미터 뒤에서 급정거한 그녀의 차가 이상해 보였는지 경찰 하나가 차에서 내려 다가온다. 순간 그녀에게 독특하고도 무모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음성녹음 버튼을 누르고 창문을 열었다. 경찰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녀를 훑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녀의 입에선 언어와 오열이 뒤섞여 쏟아져 나온다.
“부탁이니까 당장 여기서 차를 빼서 멀리 가 주세요. 이유는 묻지 마시고요, 나중에 다 말씀드릴께요. 제발.. 제발이요...!”
경찰이 순순히 차를 뺄 리 만무하다. 더욱 더 이상한 눈초리로 그녀를 다그친다. 여차 하면 연행할 기세다.
그녀는 무섭게 경찰을 노려본다.
“나 미친년이예요. 미친년은 피하는 게 상책이잖아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하늘을 보며 짐승같은 괴성을 지른다. 그리고 그녀의 울부짖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이 화답한다. 순간적으로 주위가 환해지더니 우르릉 콰쾅!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이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녀와 경찰이 동시에 놀란다. 하지만 경찰이 더 놀랐다. 그녀의 광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상이변 때문인지 경찰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쳐 자기 차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명령대로 차를 빼지는 않는다. 조수석의 경찰과 이쪽을 흘끔거리며 속닥일 뿐.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는 휴대폰의 저장 버튼을 누르고 지체없이 차를 출발시킨다. 유괴범을 만나면 방금 경찰과의 대화를 들려주고 정상참작을 요구할 것이다. 시간은? 5분 남았다. 5분에 1km는 우스운 거리다. 그런데,
운명이 그녀에게 꽤 심한 장난을 쳤다. 휴게소를 불과 700여 미터 앞두고 앞차가 정지한 것이다. 앞차의 앞차, 그리고 옆차선의 옆차와 그 앞차도. 휴게소 근방에서 대형 트럭 하나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옆으로 넘어져 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돈가방을 쥔 채 빗속을 뛰기 시작한다.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다. 달리다가 빗길에 넘어진다. 무릎을 심하게 찧었다. 다시 일어나 다리를 절며 달린다. 휴게소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시간은 한참 지났다. 그녀는 이제 시계를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거대한 절망이 그녀를 엄습한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걸어가는 그녀는 울음을 조금만 더 참자고 스스로를 단속한다. 그러나 잠시 후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결과와 대면할 지 모른다는 예감이 휴게소가 가까워질수록 짙어진다.
언제부턴가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다. 그걸 올려다 본 그녀는 그 선명한 일곱 빛깔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춘다. ‘정말로 누가 그린 것 같네. 저게 아마도 내 생애 마지막 무지개가 되겠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쨌거나 정말 아름답군.’ 그녀는 무엇에 홀린 걸음걸이로 무지개를 쫓듯 휴게소로 진입했다.
휴게소 뒤편 야산에 걸쳐져 있는 무지개의 아치 아래 젊은 남자가 조그만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다.
아이 엄마는 얼빠진 듯 잠시 서 있다가,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심장에도 발성기관이 있는지 그녀는 자기의 박동 소리를 똑똑히 듣는다.
그녀와 그들과의 거리가 어지간히 좁혀졌을 무렵, 젊은 남자는 아이의 손을 놓고 가볍게 등을 떠민다.
아이 엄마는 실성한 듯 달려들며 두 팔을 벌린다. 아이는 기꺼이 그 품에 안겨든다. 모자간의 감격적인 포옹. 엄마의 얼굴에선 비온 뒤의 계곡처럼 급류가 흐른다.
젊은 남자는 이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서 있다.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하지도 않는다. 손에 무기같은 것도 없다. 주위에 공범으로 보이는 인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이 엄마는 눈물을 닦고는 비로소 남자를 쳐다본다.
“저, 유괴하신 분.. 맞죠?”
“아, 예. 뭐...”
“다른 공범 분들은..?”
“저 혼잡니다. 아까 전화로는 또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아, 예..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오다가 앞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많이 걱정하셨죠?”
“아닙니다. 차가 막히나 했어요. 아이가 여기 있는데 설마 안 오실려구요.”
“오다가 경찰차를 하나 봤는데..”
“신경쓰지 마십시오. 경찰이야 어디든 있는 거 아닙니까?”
“아, 예..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애를 이렇게 무사히 보살펴 주시고..”
“별 말씀을요, 그게 제 일인걸요..”
“아니예요. 너무 감사드려요. 여기..”
그녀는 현금이 든 가방을 통째로 넘겨주고 젊은 남자는 공손히 받는다. 이어 그녀는 깊이 머리숙여 인사한 뒤 아이를 안고 서둘러 돌아선다. 인상 좋고 예의 바른 남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유괴범이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겠다는 신념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잠깐! 이란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어깨가 젖혀진다. 가슴이 다시 철렁 내려앉으며 그녀는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준다. 열려진 돈가방을 들고 서 있는 남자는 얼얼한 표정이다.
“너무 많아요.”
“.....예?”
“이 정도 액수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아이 엄마는 아이를 내려놓고 몸을 추스른다.
“아니예요. 제 마음은 그 이상이예요. 넣어두세요.”
“아닙니다. 제가 이걸 다 받으면.. 날강도지요.”
“내 아이가 잘못됐으면 전 살아있지 못해요. 두 사람의 목숨 값으로 그 돈이 뭐가 대수겠어요? 다행히 경우있는 분 만나서 애를 찾게 됐는데, 엄마가 되가지고 자식 가지고 흥정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아까 성의껏이라 하셨잖아요. 이게 제 성의니까 받아두세요.”
“아, 그건 직업상 멘트일 뿐이구요, 음.. 원래 전 5백을 예상했는데, 정 그러시다면 천만원만 받겠습니다. 나머진 넣어두시지요.”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세상엔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이 유괴해놓고 몇날 며칠동안 숨바꼭질 시키고, 돈 먼저 받고 아이는 돌려보내지도 않고, 이리저리 야비한 플레이로 결국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 그런 치들.. 그에 비해 전 얼마나 행운압니까? 그에 따른 비용은 결코 아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어요. 좀 전에 생긴 저 무지개를 보는 순간 확신했구요. 아니나 다를까, 내내 상쾌한 바람이 불었고 이처럼 귀여운 아이도 만났고 또 어머니같은 좋은 분도 만나서 일이 잘 풀렸습니다. 뭐 잘 아시겠지만 혼자 오시겠다고 하고는 경찰과 미리 상의해서 함정 파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애는 얌전히 있으라 해도 말은 죽어라 안듣고 내내 울기만 해서 정말 암담한 경우도 많구요... 행운아는 바로 저란 말입니다. ... 우리 이렇게 하죠. 정확히 반으로 나눠서 나머지를 아이를 위해 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흥정이란 느낌이 덜 할 거고..”
아이 엄마는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한다. 돈을 반으로 나눠 각자 담은 뒤 잠시 말이 없는 두 사람 사이에 따뜻한 침묵이 흐른다. 이윽고 남자가 먼저 깍듯이 인사를 하고 여자가 공손히 답례한다. 멀어지면서 남자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고 아이도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차는 어느새 갓길로 치워져 있다. 아이에게 안전벨트를 매 주며 엄마는 마지막 확인을 한다.
“아저씨가 잘 해줬니?”
“응.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줬어.”
“아무튼 무서웠지? 그래도 좋은 아저씨 만나서 다행이야.”
“엄마.”
“응?”
유치원 다니는 아이는 엄마를 보며 해맑게 웃는다.
“참 재밌는 세상이야.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