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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Mar 21. 2023

알파치노와 도베르만

해외 체류기


 오래 전에 영국의 소도시에서 몇 달 머문 적이 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업이 없던 나는 공짜 숙소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어 날아갔다. 생애 최초의 타국 방문이었다. 짐을 풀고는 그날부터 그저 머물렀다. 관광도 여행도 하지 않고 뭔가를 배우지도 않고 그냥 현지인처럼 살았다. 밥을 해 먹고 집안일을 하고 책을 보거나 산책을 하는 게 다였다. 영어도 못하고 돈도 없는 동방의 젊은이에게 어울리는 삶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낯선 공간이라는 이유로 재미가 있었다. 특히 산책은 이국의 이국적 건물과 골목, 가게들을 그저 훑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보통 오후 무렵에 집을 나선다. 주머니엔 책 한 권과 담배 한 갑, 1파운드 동전 한 두 개가 들어 있다. 여기저기를 소요하며 풍경들을 눈에 담는다. 걷다가 다리가 아파지면 적당한 벤치에 앉는다.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그게 지겨워질 무렵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어느덧 해가 져서 글자가 보이지 않으면 벤치에서 일어난다. 땅거미가 깔리는 길을 다시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 일과였다.

      

 벤치가 무슨 업소는 아니지만 굳이 잘 가는 벤치가 있었다. 지은 지 백 년도 넘어 보이는 두 개의 석조건물 사이에 마당에 가까운 작은 광장이 있었는데, 햇볕이 들지 않아 늘 어두웠다.  거기의 양 끝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치하듯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벤치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내 단골 장소였다. 다른 사람들이 양지 바른 벤치에 앉아 있을 때 난 거기서 그 음침한 고풍스러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나와 마주 보는 또 하나의 벤치도 사실상 주인이 있었다. 알파치노를 닮은 노숙자였는데, 언제부터 자리 잡았는지 모르지만 그는 내가 그 공간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거기에 있었다. 거기서 사는 것 같진 않았지만 늘 있었다. 나보다 먼저 출근하고 나보다 늦게 퇴근하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행색에 비해 참으로 위엄이 있었다. 쓸데없이 희노애락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나마 어떤 미세한 표정 변화도 엄청난 주름과 수염 때문에 도저히 포착할 수 없었다. 생김새 뿐만 아니라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카리스마 비슷한 것이 영락없이 영화속의 알파치노였다. 

 그리고 그의 곁엔 그에게 걸맞는 큰 개가 역시 위엄있게 앉아있었다. 셰퍼드와 도베르만의 잡종으로 보이지만 워낙 마른 까닭에 도베르만에 가까운 그 개는, 주인의 가르침 탓인지 입을 헥헥거린다거나 꼬리를 살랑대거나 함부로 짖지 않고 늘 조각상처럼 앉아 있었다. 

 10평 남짓한 공간, 음기 가득한 두 개의 벤치를 우리는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본의아니게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나서 난 주로 책을 보았고 알파치노는 먼산을 보며 그냥 앉아있었고 도베르만 역시 먼산을 보며 그냥 앉아있었다. 평범하다고도 독특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런 풍경이 거의 매일 반복되었다.      


 그날도 난 책을 보고 있었고 알파치노는 공허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도베르만은 공허한 눈빛으로 측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을 흘렀을까, 잠깐 책을 덮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고개를 들었을 때 알파치노와 눈이 마주쳤다. 

 보통 모르는 사람끼리 눈이 마주치면, 적의나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아닌담에야 동시에 외면하기 마련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직후 난 책으로 눈을 내리깔면서 그도 원래 눈으로 돌아갔으려니 했으나 잠시 후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어 눈을 들었더니,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조금 전의 멍한 눈이 아니라 내게 정확히 초점이 맞춰진 시선이었다.     

 

 난 내 조국에서 비슷한 경험이 많았다. 워낙 그런 장소를 좋아하다 보니 노숙자들을 심심찮게 만났고 가끔씩 그들은 나에게 뭔가 자잘한 것들 - 가령 담배나 푼돈 - 을 요구하곤 했다. 사실 영국은 그보다 조금 더 했다. 동양인이 만만한 건지 인심이 후하다고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심심치 않게 구걸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 나를 향한 알파치노의 시선이 적의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니, 혹시 또 모르지. 이 자리의 선배로서 내게 텃새를 부리려는 것일 수도. 그런데 인제 와서? 아무튼 오히려 후자 쪽을 더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알파치노가 그동안 나에게 쌓아줬던 이미지가 있는데 그토록 의연해 보이는 그가 거기서 담배나 동전을 구걸한다면 난 정말 실망할 것 같았다. 

 반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 아주 오만하고 떳떳하게 담배를 요구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떳떳한 건 좋은데 그러면 나도 기분 나쁘지. 그럼 뻔히 있는 거 아는데 없다고 그럴 수는 없고, 거절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좀 쪼잔해 보이기도 하고 혹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칠 것을 각오하기엔 아직까지 측면을 보고 있는 도베르만이 좀 부담되기도 하고...    

 

 몇 분만에 대충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텃새를 부리거나 시비를 걸면 조용히 거기를 떠나주고, 뭔가를 요구한다면 요구하는 태도에 상관없이 내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주자. 남의 나라에서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자.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니라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버럭 치밀었다. 

- 저 자식 때문에 지금 같은 줄을 열 번 넘게 읽고 있잖아!!!     


 그러는 동안 계속 나를 보고 있던 알파치노가 드디어 일어났다. 물론 난 긴장했다. 

일어선 후에도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왔다. 난 비교적 빠른 동작으로 책을 덮고 꼬았던 다리를 풀고 꺾어 신었던 운동화에 발을 단단히 집어넣고, 튕겨 일어날 때의 탄력을 위해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그는 숨결이 닿을 만큼 나에게 가까이 온 뒤에 손을 뻗었다. 난 움찔 하면서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의 손이 노린 곳은 내 몸이 아니라 내 옆의 쓰레기통이었다. 그는 나와 옷깃을 여러 번 스치며 한참 동안 쓰레기통을 뒤지더니 비교적 장초를 하나 찾아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품속에서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고는 깊게 빨아 연기를 하늘로 내뿜었다.    

  

 잠시 주인의 동선을 따라 정면을 바라보던 도베르만은 다시 측면으로 고개를 돌렸고 난 알파치노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하며 문득, 얼어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는 남산골 선비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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