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방패막이 된 미키
엄청나다. 영화 ‘미키17’를 본 순간 처음 든 생각이다.
나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 영화가 대작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영화 초반을 보다가 마치 쇼핑 중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것이 나의 대작 감지 센서인 셈이다. 오늘 미키17를 보고 이 센서가 울렸다.
장르만 SF일뿐, 이 영화는 SF 영화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실제로 만나기 어려운 우주라는 공간이 주는 신비로움과 웅장함, 그런 압도적인 스케일을 표현하는 SF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르를 구분 짓 않고, 인간이 중심이 되는 휴머니즘에 가까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어떻게 맞이해야 되는가, 수많은 질문과 생각 속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미키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익스펜더블’이다. 똑같은 신체와 이전의 모든 기억을 갖은 채, 미키는 복사기에서 출력하여 나오는 문서처럼 휴먼 프린터를 통해 계속 출력된다.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곧바로 버려지는 소모품인양 죽으면 다시 프린트하여 또 다른 미키를 만들어 낸다.
미키는 반복적인 죽음을 여러 차례 맞이한다. 그렇게 16번의 죽음으로 탄생한 미키17.
익숙하지 않은 것도 반복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다르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암흑 같은 죽음에서 당당한 이가 있을까. 미키도 마찬가지였다. 계속되는 죽음에서 미키는 여전히 두렵고 무서웠다. 이는 미키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키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미키를 실험 대상으로 사용한다. 손쉽게 다시 얻을 수 있는 존재는 가볍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미키는 막 쓰는 종이처럼 험하게 굴려진다.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방대한 방사능에 피폭되며 손목이 잘리는 등 끊임없는 고통을 경험한다. 그렇게 그들은 미키를 통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 나간다. 죄책감 없이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미키를 죽이고 또 죽인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이들을 추악하게 만들었다. 월등해 보이는 인간도 결국 여느 생물체처럼 탄생과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에 인간은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미키에게 죽음의 느낌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질문에서 그 나약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지구가 아닌 미지의 행성이다. 인간에게 어떤 해를 입힐지 모르는 개척해야 나가야 할 곳인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키가 필요했다. 인간에게 위험한 일을 기계가 대신하듯 미키는 죽음을 막아 줄 방패 같은 존재로서 그 기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미키를 제외한 인간을 위한 만행을 서슴없이 해 나갔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기술의 발전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는 새로운 문제도 함께 따라온다. 기술을 온전한 방향으로 사용한다면 괜찮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 기술을 악용하는 사례는 등장하고 이는 우리를 딜레마에 빠트린다.
이 영화도 휴먼 프린팅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문제로 이어진 것이다. 인간이 만든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과연 앞으로 발전해 나갈 기술은 우리에게 득일까 실일까. 영화를 보며 한 번쯤 생각해 보길 바란다.
※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아트인사이트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4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