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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아줌마 Feb 12. 2024

의식은 어떻게 감각질(qualia)을 가질까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나요?"


일상에 쓰이는 '의식'의 용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마취 상태에 있던 환자가 의식을 회복할 때일 것이다. 조금 전까지 몸을 절개해도 느끼지 못하던 환자가 갑자기 다시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한다. 아픔을 느끼고 사람들의 말도 알아듣는다. 이렇듯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작용'을 우리는 의식이라 부른다.


그런데 의식이 있는 상태가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그것이 신비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느낌과 지각의 의식'이라는 것을 로봇에게 심어주려 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불가해한 현상인지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자동 수리 체계를 갖춘 로봇을 만든다고 해 보자. 이 로봇은 충격을 받아서 전선이 끊어지면, 전선을 가져다가 스스로 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로봇이 문제를 인식하고 수리할 때 고통을 느낄까? 혹은 우리가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 굳이 고통을 설계할 이유가 있을까?


수리가 목적이라면, 몸통에 센서를 달고 센서가 감지한 '문제 발생' 신호를 수리 프로그램에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로봇에게 굳이 고통을 느끼게 할 이유는 없다. 또 설령 고통을 입력하고 싶다고 해도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전선의 끊어짐'이라는 물리적 사건을 '고통'이라는 전혀 다른 질감의 의식적 사건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의식 연구의 뜨거운 감자인 '감각질' 문제, 다시 말해 의식은 어떻게 내면적 감각질을 갖는가의 문제이다.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듯 기계적이고 단순한 현상이 아닌 것이다.




지난 몇십 년은 뇌과학의 시대였다. 그 발전이 너무 놀라워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뇌가 곧 마음'이라는 암묵적 믿음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감각질' 문제는 이 가설에 근본적이고 원리적인 의문을 던진다. 달리 말해, '뇌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감각질'은 감각의 속성을 뜻하는 말이다. '퀄리아(qualia)'라고도 불린다. 일상적으로는 '느낌의 질'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예를 들어, 꽃 향기를 맡았을 때 우리는 '흐음.. 향 성분이 나의 코 점막을 자극하는군.'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대신 '달달하고 상큼한 향'을 느낀다. 이 향기, 다시 말해 우리의 의식에 주어지는 감각적 특성이 감각질이다. 그러니까 의식의 감각질 문제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외부의 물리적 자극이 어떻게 우리의 내면에 감각적 질감을 일으키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감각질 문제는 고통이나 향 뿐 아니라 시각, 청각 등 다른 감각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시각을 생각해 보자. 시각을 일으키는 정보의 원천은 전자기파의 특정 파장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전자기파의 다양한 파장이지 색깔이 아니다. 그런데도 전자기파의 특정 파장이 우리에게는 특정한 '색色'이라는 '감각질'로 인지된다. 게다가 가시광선을 넘어서는 전자기파는 '열'로 감지되거나 아예 감지되지 않는 데 반해, 유독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좁은 대역만 다양한 색깔로 세밀하게 쪼개져 감각된다. 왜 그래야 했던 걸까. 혹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물론 어떤 분은 특정 신경 세포의 발화가 원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A라는 조건이 주어질 때 B라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A를 B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전원 버튼을 눌러야 TV가 켜지지만, 전원 버튼이 TV 프로그램의 원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특정 신경 세포가 발화되면 고통이 일어난다. 하지만 '신경 세포가 왜, 그리고 어떻게 고통이라는 느낌을 의식(마음)에 일으키는가'라고 질문하면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최고의 석학들이 이 문제에 매달리고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것이, 그리고 수천 년간 마음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도 합의된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것이 바로 이 문제 때문이다.




'의식'에 관한 접근이 이렇게 어렵다 보니, 최근 일군의 학자들은 의식을 '창발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쪽을 선호한다. 수십억 개의 신경세포가 특정한 배열과 구조로 조직화되면 거기서 '의식'이라는 전에 없던 기능이 새롭게 생겨난다(창발創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대개 기능주의적 시각으로 이어지는데, 기능주의는 '인간의 지능을 데이터 처리를 위한 규칙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자.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뇌세포'라는 하드웨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의식'이라는 마음의 소프트웨어가 작동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드웨어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의식'이라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경험과 연결되는지 알지 못한다. 즉, 그 부분은 블랙박스로 남겨져 있는 셈인데, 이 블랙박스를 열기가 어려우니 일단은 이를 창발이라 표현하고 넘어가자. 그러면 학자들은 이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분리하여 의식의 기능을 연구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고통의 질감이 아니라 ‘물리적 손상을 경고하는 알림’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고통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 기능을 반도체와 같은 다른 하드웨어에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즉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다. 현재 의식과 뇌에 관한 연구는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본질을 펼쳐 놓고 보면, 창발이라는 말이 거창한 발견이 아니라 실제로는 '모른다'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독일 본Bonn 대학교 철학과 석좌 교수인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인간의 정신을 물리 법칙만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자연주의'의 믿음이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기능주의는 오늘날 만연한, 무신론자들을 위한 종교의 한 부분이며, 그 종교는 곧 자연주의다. […] 오늘날 기능주의가 득세한 것은,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뒷받침하는 진짜 증거나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간접적으로 믿는 것을 기능주의가 허용하기 때문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주장이 옳다. 의식이 뇌세포에서 나온다는 주장은, 알고 보면 의식이 영혼에서 나온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믿음의 체계일 뿐이다. 엄밀한 입증의 측면에서 보면, 두 주장 모두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다. 현재까지는 유물론과 유심론이 무승부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분들은 의식이 뇌세포에서 나오든 영혼에서 나오든 그것이 왜 중요하냐고 반문하실 것이다. 사과가 왜 붉게 보이는지 몰라도 사과는 여전히 사과니까 말이다. 또, 기술자들은 의식의 비밀을 알지 못해도 로봇은 만들 수 있다고 안심할 것이다. 하지만 색깔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는 곧 느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묻는 것과 같고, 이는 인간의 행복에 직결되는 문제다.


조건 반사를 발견한 파블로프는 1904년 노벨상을 받으면서 “실제로 우리 삶에서 유일한 관심거리는 우리의 심리적인 경험”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무엇을 경험한다는 것은 결국 의식에 나타나는 감각질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행복의 요소로 거론되는 '쾌快/불쾌'의 본질도 결국은 마음에 주어지는 감각적 느낌이고, 가슴이 아프다는 느낌도 일종의 감각질이다. 로봇을 만들기 위한 인지과학이 아니라,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인지과학이라면 '뇌' 못지 않게 '의식'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에게는 '심리적 고통'이 '생물학적 문제'보다 더 큰 관심사이다. 육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의식이 갖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경험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인류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많은 학자가 '의식'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십 년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뿐, 의식 그 자체에 관해서는 실상 접근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정말로 '마음'이란 무엇일까?


난제의 발견 그 자체가 곧 해결의 실마리다.
- 아리스토텔레스


# 인용 출처 :  『생각이란 무엇인가』, 마르쿠스 가브리엘, 열린책들 / 『물리주의 physicalism』, 김재권 저,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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