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실재에 관하여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칼국수, 어때요?"
점심 무렵이 되어 어머니께 여쭈어본다.
"좋지. 안 그래도 칼국수 해 먹자 하려던 참인데..."
어머니의 답을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을 어머니가 읽으신 걸까, 아니면 어머니의 생각을 내가 읽은 걸까?
대부분의 사람이 우연이라 여길 이 순간을 내가 일종의 텔레파시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에게 타인의 생각을 감각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육체만을 나라고 생각하면 이 우연을 설명할 길이 없지만, 오라를 포함한 나의 존재장(場) 전체를 나라고 생각하면 이 현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감각의 측면에서 보면 나는 이 존재장을 매질(媒質)로 하여 세계와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팔을 건드리면 나는 그 변화를 인식할 수 있다. 나의 신체가 외부의 상황을 내 의식에 전해주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개입이 필요하지만, 일단 의식은(그것이 뇌든 아니든) 토끼의 간처럼 빼내어 양지 바른 바위 위에 두었다고 가정하자. 그 곳에서 몸이 보내는 정보를 수신하고 있다고 말이다.
상황을 이렇게 가정해 놓고 보면, 몸이란 결국 나에게 일어난 물리적 변화를 의식에 전해주는 일종의 '매질媒質'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의식에 전하는 것이 육체적 감각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공간에 들어섰을 때 분위기가 가볍거나 무겁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 멀리서 누군가가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거나 누군가의 에너지가 좋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보이지 않고, 접촉도 하지 않는 변화들은 어떻게 인식될까?
과학적 원리대로라면, 이러한 느낌들 역시 특정한 매질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아무런 대상이나 매개가 없는데도 이런 느낌이 그냥 생기는 것이라 주장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과학적 태도가 될 것이다. 게다가 물리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아원자로 가득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분위기(雰圍氣)'라는 것이 말 그대로 '공간을 둘러싸 채우고 있는 아원자 장(場)'이고, 우리가 그 에너지장의 변화를 나의 에너지장을 통해 감각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초감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오라가 감각의 매질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몸에 가까운 1,2,3 오라층이 주로 정서에 관계된 변화를, 그리고 5,6,7 오라층이 지적 정보(사고思考)와 관계된 변화를 전달하는 매질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3 오라층이 진동하면 그것이 감성의 변화로, 5,6,7 오라층이 진동하면 지성의 변화로 우리의 의식에 감각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 모형에서 1,2,3 에너지층을 '감성체'로 5,6,7 에너지층을 '지성체'로 명명한 것도 이런 이유이다.
지금도 학자들은 어두운 두개골 안에 갇혀 눈도 없고, 코도 없이 존재하는 뇌가 어떻게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지를 두고 다양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각기 다른 진동의 매질로 구성된 복합체라 가정하면 이 의문은 곧 해소된다. 또, 학자들을 고심하게 만드는 '심신 문제'도 쉽게 해결된다.
의식이 뇌에서 비롯된다는 부수현상론은 마음의 발생에 관한 가장 유력한 가설로 인정받고 있지만, 여전히 두 가지 측면에서 이론적 한계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는 '내적 의식'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심신 문제'라 일컬어지는, 몸과 마음이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다. 뇌에서 마음이 생기는 것이라 설명하면 육체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잘 설명할 수 있지만, 마음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육체에서 나온 마음이 어떻게 다시 육체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뇌의 구조까지 변형시킬 수 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몸' 개념에 에너지층을 포함하면 이 문제 역시 손쉽게 해명된다.
비유컨대 우리 존재가 일종의 호수라 생각해 보자. 호수의 전체 생태계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물고기 뿐 아니라 호수의 물, 그리고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까지를 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물고기만 관찰해서는 산소를 찾아 수면으로 떠오르는 물고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존재를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세포와 장기만 바라봐서는 몸과 마음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에서 인체를 하나의 소우주라 여긴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몸의 개념을 오라 영역까지 확장하면 몸과 마음의 구분이 매우 모호해진다. 오라는 일종의 에너지고, 에너지도 물질과 다를 바 없는 물리적 실재다. 그래서 오라가 마음의 실질적인 질료가 된다는 말은 다시 말해 마음도 물리적 실재를 갖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과거의 철학자나 성인들은 마음이 비물질이라고 가르치셨지만, 당시는 에너지나 공기(空氣)의 개념조차 알지 못하던 시대다. 마음이 정말로 '무無'나 '공空'이라 여겼다면 그것을 언급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 분들도 무언가 실재함을 아셨지만, 그것을 명명할 개념이 없어서 '공空'이라거나 '영(靈)'이라거나 비실재라는 표현을 쓰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발전한 21세기에 와서까지 과거의 개념틀에 갇힐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오라를 에너지로, 즉 실재적인 물질로 여기면서도 얼마든지 그 분들의 가르침을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눈에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변화를 육체적 감각이라 말하고,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변화를 마음의 감각이라 부른다. 하지만 오라까지를 고려해 존재를 규정하면, 본질적으로는 몸과 마음이 다를 것이 없다.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은 똑같이 일종의 '몸'으로서 외부 세계의 변화를 나에게 전해주는 매질의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사실 '육체'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이 존재 전체, 일종의 존재장이라 할 에너지장 전체가 실질적인 '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