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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미 Dec 31. 2023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지만

잊어선 안 될 아픈 기억


'보육교사 생존기'라는 매거진에 글을 써 내려가며 난 사실 거침없이 펜을 들었다. 이전에 참 열심히 살았던 시간, 나름 자신의 신념을 지켜가며 가능한 내 기준에 올곧게 서 있으려 노력했던 삶이었기에 어딘가에는 남겨놓고 싶었다.

그런데 그다음 글쓰기 소재에서는 잠시 주춤거림이 있었다.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 며칠 아니 몇 주를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어제오늘 조금씩 윤곽이 잡히고 이제는 써도 되겠다 싶어 때마침 마음먹은 바로 이 시간, 또다시 나의 지난날들을 솔직하게 써내려 갈 생각이다.




어느덧 주임교사 생활에도 익숙해져 갈 때쯤 한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교사와 학부모간의 오해로 빚어진 상황, 사건 전개는 이러했다. 아이가 집에 가서 선생님이 자신에게 했다는 행동(포크로 자신을 찔렀다)의 얘기로 엄마는 의심의 눈초리 플러스 화가 많이 났고 결국 교사에게 폭행을 휘두르며 그야말로 어린이집은 난장판이 됐던 것였다. (선생님은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다) 하필 그 시각 원장님은 부재셨고, 주임교사였던 내가 중재자로 나섰지만 결국 같이 있다 내게도 폭행, 폭언이 함께 동반되면서 상황은 일단락 됐지만 사건이 종결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서서히 마음의 문을 닫아가고 있었다. 내가 맡았던 학부모님들과는 큰 트러블이 없었지만 여전히 언젠간 나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이유 모를 압박감 그리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까지 그렇게 난 일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소명마저 점점 사라져 가는 상태였었다. 그리고는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교사의 일을 잠시 쉬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나는 임신 중에 있었다. 거의 만삭에 가까웠었는데 어느 날 대법원에서 보내온 통지서, 재판 출석에 관한 것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절한 타이밍에 해당 검사로부터 문자와 전화가 걸려왔고 그 사건의 해당 선생님 그리고 원장님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과 어쩔 수 없는 연락이 연달아 닿으면서 꽤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었다.(퇴사과정이 순조롭진 않았기에) 소송을 지나 고소와 맞고소 결국 재판까지 넘어왔구나 싶은 참 질긴 상황에 대한 지쳐버림과 사실 난 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끌고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라며 이미 원장님에 대한 실망과 신뢰가 깨져버린 상황였기에 그저 이 같은 상황에선 도망치고 싶은 심정였다. 그러나 결국은 내가 가야만 했던 상황, 그렇게 일주일 앞두고 출석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지 못한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해당 선생님의 부고 소식였다.




사실 아직도 그때 일은 잊을 수가 없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상황였고 어쩌면 이제 종결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갑자기 끝나버리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난 동료교사를 원망 아닌 원망을 하면서도 "그러지는 말지, 이제는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혼잣말하고는 보내줘야만 했다. 부디 그곳에서라도 자유롭게 살 길 바라며 말이다.


폭행을 당했던 사람이 그 교사와 나 둘뿐였으니 재판장님 앞에서 그때 그 상황을 얘기할 사람은 결국 나밖엔 없었다. 그렇게 난 그날 남편과 함께 법원에 출석했고(하필 그날은 내 생일였고 뱃속엔 아이가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바로 다리에 힘이 풀려 계단에 앉아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물의 의미는 꽤나 복잡함을 담고 있었다. 슬픔 안타까움 교사로서의 수많은 생각들까지. 그리고 며칠간은 말을 아낀 채 그저 이젠 이 사건이 제발 종결 나길 바라고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추후 들은 소식으론 결국엔 사건 종결, 그런데 억울한 교사의 죽음이라는 청원글이 올라오며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이제는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알게 됐다는 것였다. 검색만 해도 나올 정도로 여기저기서 나오는 사건이 됐으니, 심지어 최근 내가 다니는 미용실에서 미용사가 내게 그 사건 아냐며 얘기하시는데 난 그저 "그렇군요"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던 시간였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이렇게 글로 나의 심정을 써 내려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만난다거나 벌어진 현장을 지나쳐야 할 때? 사실 바로 어제 일처럼 아직도 생생한 기억들이기에 마주하기 쉽진 않겠지만 이제는 이렇게 나의 삶을 누군가 읽을 수도 있겠단 이 공간에 쓰고 있음에 조금은 감사한 생각도 든다.(벗어나지고 있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고 때론 복잡한 슬픔이 밀려와 아프고 씁쓸한 느낌이 든다는 건, 어쩌면 내게 있어선 잊어서는 안 될 마음 같기도 하다.

그 사건을 나라도 꼭 기억해 달라는 부탁의 흔적였을까 그렇게 지금의 나는 아직도 교사로서의 어두운 터널 또한 가끔 지나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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