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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Jun 13. 2024

오늘은 퇴근하고 행복해야지

퇴근 후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나는 언제나 퇴근하고 나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자기 계발 같은? 아니면 노후대비 같은? 나는 칼퇴근을 했고, 집안일을 하지도 않았고, 투잡을 뛰지도 않았고, 아이를 돌보지도 않았으니, 이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하는 그 뭔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내 몸은 게을렀다. 걱정하는 만큼, 압박감을 느끼는 만큼,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휴대폰을 만지며, 의미도 없는 정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런 나 자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몸은 널브러져 있지만, 마음은 항상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게으를까?     


남들은 이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해서 몸값을 올리거나, 운동해서 체력과 몸을 만들거나, 공부해서 미래를 대비하거나, 투잡을 뛰어 돈을 버는데, 나는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도 않을 거면 차라리 해야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지 말 것이지. 어째서 눈만 높은 인간일까? 어째서 나란 존재는 이토록 한심한 존재일까? 드물게 성실하게 보내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좀 더 집중하지 못했음에, 효율적으로 시간 활용을 하지 못했음에, 더 나은 활동을 하지 못했음에 화가 났다. 제 발로 갯벌에 들어가 놓고, 진흙 속에 있는 자신을 탓하는 자신의 한심함에 우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며칠 전이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다 문득, ‘오늘은 퇴근하면 집에 가서 책이나 보고 쉬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책은 특별한 책은 아니었다. 내가 읽고자 노력하는 고전이나 인문학, 또는 매번 읽다가 포기하는 기초과학 서적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도서관에서 빌린 가벼운 일상 에세이 책이었다. 엄청난 지식이 담겨 있지도 않고, 탁월한 문장으로 경탄을 터뜨리게 하는 책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공감이 이루어지는, 어렵지 않아서 술술 읽히는, 나쁘지 않은 그런 책이었다. 내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않는, 편안한 책. 그래서 마음이 가벼운 책. 그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퇴근이 기다려졌다. 내게 다가올 그 느슨하고 편안한 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렜다. 낯선 들뜸이 나를 사로잡았다.      


보통 사람들은 퇴근을 엄청 기다린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퇴근을 기다렸지만, 퇴근 후 그 시간 자체를 기다린 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퇴근 후 나는 또 다른 장소로 출근했던 것과 같았다. 뭘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뭔가를 해야 하는, 그런 조악한 회사로…….     


그날 처음, 그 회사가 휴일을 외쳤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나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퇴근 후, ‘쉼’을 느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보는 건 어떨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거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너그러워지면서 신이 났다. 퇴근을 기다린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매일 밤, 매주, 이런 행복함에 살았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질투가 날 정도였다. 히히히, 얼굴에 웃음이 번지려는 순간이었다. 내 가슴속에서 누군가의 거친 반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미래가 걱정도 안 되니?     


**


나는 언제나 과거 아니면 미래에 살았다. 과거에 한 실수 때문에 괴로웠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스러웠다. 나는 평일에는 주말에 뭘 할까 고민하며 보냈고, 막상 주말이 되면 평일의 출근이 걱정스러워 몸을 사렸다. 마음이 내킨다고 충동적으로 여행을 간다거나, 체력 이상으로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었다. 현재의 나는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걱정된다. 내 미래가 걱정된다. 이 직장에서 쫓겨날 날이 걱정되고, 노후도 걱정스럽다. 그런 걸 걱정하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 같았다. 도대체 뭘 믿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그 순간, 누가 내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하지만 걱정을 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같잖아?    

 

**     


어린 시절, 나는 꽤 운이 좋아서, 내 주변에는 나만큼 똑똑한 아이가 없었다. 그 덕분에 그 누구도 나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기준점이 되는 아이였다. 2등은 1등을 보고 자극을 얻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내가 1등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나는 1등이 되기엔 너무 부족한 인간 같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제일 잘났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며 지낸다면? 미래가 불 보듯 뻔했다. 그때 가슴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아무도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와 비교하면 되잖아?     


**     


나는 때로 너무 주말이 지겹고, 퇴근 후가 지겨울 때가 있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무언가를 해야 할지 모를 때.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을 때. 그럴 때면 차라리 출근을 하는 게 났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내가, 정말, 그 정도로…. 일을 사랑한다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출근하는 게 났다고 생각했을까? 회사에 꿀이라도 발라뒀나? 깨달음은 언제나처럼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나는 그저 출근함으로써 강제로 배정받는 명확한 목표와 지향점을 그리워할 뿐이었다. 집에 있으면 자주 널브러졌다. 나는 내가 한심한 채로 있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일터에서 나는 일을 잘하는 직원이지만, 집에 있으면 걱정만을 할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나를 덜 미워하는 환경에 나를 두고 싶다- 아마, 나를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그런 식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어째서 그토록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을까?     


아마도 나는 미래가 두려웠던 것 같다. 준비하지 않으면 도태될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뭐든 열심히 하고자 했고, 열심히 할 때만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던 것 같다. 하얀 도화지 같은 시간에 무엇을 그릴까 설레하는 대신, 그림이 필요 없을 때 버려질 것을 두려워했다. 발버둥 치지 않으면 지금 내가 있는 여기까지도 진흙 속으로 가라앉을 거로 생각했다. 그 발버둥이 나를 더 가라앉히고 있다는 걸 모르고.     


하지만 나는 이번에 쉼에서 행복을 느꼈다. 내가 두려움을 이긴 것이다. 아니, 솔직히 이겼다고 말하는 건 뻥이고 처음으로 두려움에 반격을 날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 두려움은 아마도 꽤 놀랐을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맞고만 있던 내가 처음으로 반격을 했으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것을 보여준 예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제부터 두려움과 싸움에서 내가 바로 승기를 잡을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또 엄청나게 맞아서 구석으로 몰리는 날도 있겠지. 아마 자주 그러겠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단 한 번이라도 펀치를 날린 희열을 느껴봤다는 것이다. 한번 때려봤으니 두 번도 때릴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건 엄청 단순한 셈이다. 결국,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스트레스만 받는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스트레스라도 안 받는 편이 나은 거잖아? 


어쩌면 이 마음을 후회할지도 모르겠지. 이렇게 긴 시간 주절거렸지만 결국 노후 대비는 놓칠 수 없는 영역이고, 현실을 즐기라는 건 단순한 도피라는 생각은 여전하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생각을 좀 바꿔보려고 한다. 이쪽은 이래서 좋고, 저쪽은 저래서 좋다고.


내가 열심히 노후대비를 한다면 성실해서 좋고. 내가 늘어진다면 편안한 휴식을 즐긴거다. 후회하지 말자.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 나를 괴롭히지 말자. 그저 미래만 생각하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나를 생각해주자. 


그러니까, 오늘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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