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동네 슈퍼마켓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규모 은행 지점이 들어섰던 기억은
단순한 풍경의 변화가 아니었다. 나에게 그것은 금융이라는 세계와의 첫 만남이었다.
우체국에서 두 개 창구를 통해 소박하게 저축을 경험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새로 문을 연 은행은 창구가 열두 개나 운영되고 있었다. VIP 고객실까지 갖춘 은행은 어린 나에게 위압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은행은 이렇게 크고 멋진 곳이구나.
나도 언젠가는 은행에서 일해야겠다.” 그렇게 내 마음속 첫 번째 진로의 씨앗이
심어 졌다.
세월이 흘러 나는 캐피탈과 저축은행을 거쳐 결국 은행에 입사했다. 다만 영업점 창구가 아닌 본점 디지털 뱅크 전략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담당한 일은 오히려 영업점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이었다. 비대면 금융 서비스의 완전화,
모바일 뱅킹 중심의 금융 생태계 전환, 영업점의 통폐합. 결국 내가 몸담았던 디지털
금융 혁신은 부모님 세대가 익숙하게 의지하던 은행 창구를 줄여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설 연휴에 고향 집에 내려갔을 때, 집 앞에 있던 은행이 통폐합되어 사라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 자신이 추진했던 디지털 전환의 결과가 부모님을 포함한 7080 세대에게는 불편함으로 돌아온 것이다. 모바일 앱 설치와 사용법을 알려드려도, 부모님은
여전히 ATM기를 선호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보이스피싱,
해킹, 금융사기 소식이 불안을 키웠기 때문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디지털 금융의 완성은 단순히 기술적 혁신이나 수익성 확대가 아니다.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 특히 디지털 취약계층이라 불리는 부모님 세대까지 아우르는 서비스야말로 진정한 완성이라는 것을. 은행이 모바일 속으로 들어온 것은 맞지만, 그 안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완성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은행을 떠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금융 실무를 하며 쌓은 경험과 통찰을
소비자와 공유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일반 금융소비자들을 위한 글을 썼다. 이 책의 1편은 “Who Moved My Bank?”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은행 점포 축소, 인터넷전문은행의 등장, 디지털금융의 핵심 프로세스, 디지털 마케팅과 고객여정지도, 디지털 금융 사고와 해결책 등을 다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더 깊은 글, 현업 담당자와 경제·경영을 공부하는 대학생까지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2편은 바로 그 연장선에 있다. 2편 제목은 “디지털 벙커가 아니라 모두의 디지털 뱅크”이다. 디지털 금융 혁신은 종종 ‘벙커’와 같다. 기술을 앞세우다 보면 오히려
고객이 갇히고, 고객센터와 금융 영업점에서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고 이는 금융사 내부의 관성에 빠져 허우적대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를 나는 ‘디지털 벙커’라고 부른다. 본의 아니게 금융소비자나 현업 담당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시스템과 용어 속에
갇혀버리는 상황, 혹은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았지만 고객이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디지털 벙커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디지털 벙커가 아니라 모두의 디지털 뱅크이다. 부모님 세대도, 청년 세대도, 현업 금융인도, 그리고 비금융 업계에서 새롭게 뛰어드는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금융. 그게 바로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전환이다.
2편은 앞으로 7개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DX 1장: 디지털 전략 짜기와 신규 조직 구성
DX 2장: PI(Process Innovation)
DX 3장: 모바일 뱅킹 통합 프로젝트
DX 4장: 오픈뱅킹과 마이데이터
DX 5장: 신규 서비스 – 지급 결제와 인앱 금융
DX 6장: 슈퍼 앱의 시작!
DX 7장: AI와 제휴 신사업 추진
각 장은 캐피탈, 저축은행, 은행 현업에서 내가 경험한 프로젝트와 고민을 토대로 구성된다.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와 해답, 그리고 디지털 금융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금융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면서, 동시에 현업 실무자에게는 ‘현장에서 이런 고민이 있었구나’ 하는 공감과 인사이트를 주고자 했다.
7080 부모님 세대가 ATM 대신 모바일 뱅킹으로 용돈을 송금하고, 대학생이 첫 아르바이트 급여를 디지털 지갑에서 확인하며, 금융 현업자가 새로운 신사업 아이디어를 실무에 적용하는 모습. 이것이 내가 꿈꾸는 모두의 디지털 뱅크의 그림이다.
이제 더 이상 “누가 우리 은행을 옮겼는가”라고 묻지 않아도 된다. 은행은 더 이상 건물 속에 머물지 않고, 모두의 손 안, 모바일 뱅킹에서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은행은 소수의 전문가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은행이어야 한다.
디지털 벙커가 아니라, 모두의 디지털 뱅크. 이제 그 여정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