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코프스키의 <시간의 각인>에 대한 단상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면 난해하고 지루한 장면의 연속에 연신 고개를 떨구는 내가 그의 저서를 반복해서 읽는 까닭은 <봉인된 시간> 혹은 <시간의 각인>이 훌륭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만큼 ‘러시아적’ 예술가의 역사적 위치와 소명 의식을 간명하게 드러내는 텍스트는 없다. 예술의 보편적인 소임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주장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예술은 정신적인 것과 이상을 향한 영원한 동경이 존재하는 곳에서 탄생하고 정착한다. 이러한 동경은 사람들을 예술 주변으로 불러 모은다. 현대 예술은 개인의 가치 자체를 위해서 존재의 의미 탐색을 포기함으로써 잘못된 길을 걸었다. 이른바 창작은 개인화된 행동의 자기 만족적 가치를 주장하는 미심쩍은 사람들의 이상한 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술 창작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공통의 고매한 사상에 봉사한다. 예술가는 언제나 자신에게 기적처럼 주어진 재능에 보답하려고 하는 종복이다. 그러나 오직 희생만이 진정으로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것임에도 현대인은 어떤 희생도 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에 관해 점차 잊고 있다. 따라서 인간적 소명감도 잃고 있다.” (p.56)
타르코프스키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물론 예술은 자연법칙을 좇는 과학과는 달리 인간 사유의 법칙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것이 타르코프스키가 선형적으로 매끈하게 이어지는 플롯 대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시적 연결을 추구한 이유다. 그는 감독이 이 모든 걸 주관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는데,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주의적 개성의 표출 대신 절대 진리의 실현을 예술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유럽 작가주의 성향의 영화예술가들과 구분된다. 그는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계보를 잇는, 너무도 ‘러시아’적인 감독이었다.
소비에트 정권 치하에는 19세기 인텔리겐치아로부터 지적 전통을 물려받은 무수히 많은 예술가가 있었다. 스탈린 혁명 이후 노동자, 관료 집단으로부터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아 집단이 탄생하면서 19세기적 인간형과 20세기적 인간형을 구분하는 미세한 틈이 생기긴 했지만, 1936년을 기점으로 출신 성분이 더 이상 억압의 명분으로 쓰이지 못하게 되면서 그 틈새를 메꾸는 것이 당국의 목표가 되었다. 그래야만 소비에트 사회에서 계급 억압이 사라졌다고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세대의 명맥을 잇는 이들은 보다 호전적인 예술가들로부터 종종 소극적이고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최소한 인간 해방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지닌 동반자로서 인정받았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 러시아 인민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처럼 그들은 역사적으로, 사상적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서방의 권리 담론이 이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개입되기 시작했다. 19세기적 예술가들은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여리고 개인주의적인 영혼의 소유자로, 20세기형 인간들은 예술을 이념에 종속시키려 한 소비에트 정권의 첨병으로 인식되었다. 전자로부터 점점 ‘러시아’적 색채가 지워졌으며, 심지어 이들을 서방 예술가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려는 시도까지 이뤄졌다. 이들이 그린 인간 존재의 근본적 부조리는 소련의 억압적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해석되었으며, 서방 예술가들과의 자연스러운 교류는 일종의 망명, 도피 신호처럼 읽히기까지 했다.
그렇게 뒤틀리고 왜곡된 계보로 인해 혼란과 환멸을 느낄 때마다 나는 타르코프스키를 읽는다. 스탈린 집권 초기에 태어나 소련 해체 직전에 눈을 감으며 20세기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은 그는 누구보다 이전 세기의 인텔리겐치아를 동경했다. 그는 19세기 인텔리겐치아의 역사적 소명과 이상으로부터 발견한 시적 아름다움을 영화라는 그릇에 담은 예술가였다.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보다 내게 좀 더 친밀한 형식의 텍스트로 그와 같은 사실을 증언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며, 오늘도 그가 남긴 흔적을 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