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각각의 삶은 달라도 밤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작가는 그 밤들을 상상력의 시간이고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라 말한다.
또한,
그 밤에서 시는 태어나고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 회복의 시간이라 말한다.
이 책에 귀를 기울이면서 따라가 보자.
자신만의 밤의 의미를 발견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밤은 선생이 되어
작가의 수십 년의 글을 완성시켰고
황현산 작가는 떠났지만
밤은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매일 찾아옵니다.
매일 찾아오는 밤이지만
밤 시간 사이의 간극은 있고
인터넷 신문과 포털 사이트로 세상을 접하는 시대에
이전 종이 신문 사설에서 보던 글을
책을 통해서 접하며
그 시대를 느끼고
시대의 변화를 극명하게 느낍니다.
이 책이 나온 것도 10년이 넘었고
1945년생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유신시절의 이야기, 김연아 선수, 노 전 대통령 유서까지
시대감각을 가지고 읽지 않으면 길을 잃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길을 잃지 않고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다시 차례를 쭉 훑어보면서
각각의 제목 속에서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지키며
세상을 사랑하며 보낸
작가의 맑은 정신을 닮고 싶어 진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황현산 작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책을 통해 많이 남겨두었고,
독자는 그 생각을 읽으며 동의하기도 그에 맞서기도 합니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폭력에 대한 관심]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의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과거도 착취당한다]에서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 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 관람기]에서
작가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지 않도록
문제들을 잘 다듬어 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큰 울림을 주었지만
가끔은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인가?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너무 작가의 고정된 시선을 보는 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빠른 세상에 흐르듯이 살아가는 사람도
세상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모두 존재해야
작가가 말하는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어느 시대도 그 사람들의 발란스가 문제이기 때문에
천 년 전에도 수수 만년 전에도 꿈꾸던 세상을 아직도 못 이루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하니 저는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작가는 책머리에서
그 꿈이 잊히지 않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 꿈을 간직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찾아오는 밤의 시간을 선생 삼아
세상을 탐구하고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은 제자리에서 맴돌지 않고
그 꿈을 이루리라 믿어 봅니다.
그 믿음에 한발 나아가
나 역시, 시간과 함께
매일 낮.
시끄러운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밤에 다시 회복하며
시간을 늘려 쓰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온기를 찾고,
오늘에 감사하며,
밤이 되고 아침이 되는
창조의 시간을 익혀 가길 바라봅니다.
황현산/ 1쇄 2013년 06월 25일/ 한국 에세이/ 302쪽
꿈꾸는 자를 위한 밤주스를 吟味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