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방에 여귀 그린 그림이 올라왔다. 다른 일정이 있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나는 다음날 혼자서 스케치북을 펼쳤다. 여귀를 그리려다가 병에 꽂혀 있는 꽃다발에 눈에 들어왔다. 여귀대신 꽃다발을 그려보기로 했다.
이 꽃다발은 내가 N의 생일날 선물로 준 것이다.
산에서 꽃과 열매를 만나면 나는 늘 설렜다. 그 설렘을 N에게도 선물하고 싶었다.
'늘'이란 말은 익숙하다는 편안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자칫 새롭게 보지 못할 수 있다는 함정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산에서 만나는 꽃과 열매라면 다르다. 언제나 처음 본 것처럼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다.
보라색 꽃향유가 먼저 눈에 띄었다. 돌이 많고 얕은 물이 흐르는 주변에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내 무릎 정도의 높이에 피어 있는 꽃향유. 이곳에도 누린내풀에서 보던 검정꼬리박각시가 열심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꽃을 꺾으려니 솔직히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미안하면 그대로 두고 왔어야 하지만 나는 꽃향유를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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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와 좀작살열매, 덜꿩나무 열매를 더 얻었다.
꽃다발을 그리기는 쉽지 않았다.
스케치를 어느 만큼 자세히 해야 하는지. 꽃과 잎, 열매까지 다발로 섞여 있는데 색깔은 어떻게 칠해야 하는지.
옆에 누구라도 그리고 있다면 곁눈질이라도 할 텐데, 조금 막막했다.
나는 자세히 그리기보다는 붓터치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스케치는 대충 꽃이 놓일 자리만 잡고 곧바로 붓을 잡았다.
꽃다발의 정면 얼굴인 구절초부터 시작했다. 노란 수술과 흰색에 가까운 연보랏빛 꽃잎을 그렸다. 나름 열심히 색칠했다.
그런데 그려놓고 보니 꽃잎이 보이지 않는다. 구절초 꽃잎이 아주 옅은 보랏빛이었기 때문이었다.
꽃잎 테두리를 다른 색으로 선명하게 그려야 하나 나는 또 망설였다. 구절초의 청초한 느낌이 사라질 텐데, 나는 테두리 그리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꽃향유는 꽃 색깔이 보랏빛이라 표현하기가 좀 더 쉬웠다. 꽃이 덩이로 피지만 그 덩이 속에는 많은 꽃이 있다. 그 꽃들을 나는 선을 그어나가듯 채워나갔다.
다음은 좀작살, 좀작살은 열매가 작다고 '좀'이라는 말이 앞에 붙었다. 그러니까 보라색 좀작살 열매는 아주 작게 그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솜씨는 마음을 따라주지 않고 크게 표현되었다.
마지막으로 덜꿩의 빨간 열매를 그리는 걸로 꽃다발은 완성되었다.
그려놓고 보니 스케치 정도만 한 그림 같았다.
단체방에 자습을 했다며 꽃다발 그림을 올렸다. 이 그림을 보고도 모임 분들은 칭찬이다.
후기
꽃과 열매를 꺾어온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시들어가는 꽃을 비닐에 담아 다시 산으로 가지고 갔다. 여기저기 흩뿌려주며, 고맙다고 내년에 또 보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