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다오-타이동
생각보다 멍이 크게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왼쪽 허벅지 옆쪽에 든 멍이 스칠 때마다 아팠다. 오른쪽 무릎에 까진 상처도. 오늘 새벽 5시 반쯤에 눈이 떠져서 스쿠터로 섬 한 바퀴 돌까 싶어 숙소를 나섰다. 이미 해가 떠있다. 뤼다오는 5시 초반이면 해가 이미 뜬다고 한다. 새벽 5시 40분경에도 어스름한 정도도 아니고 그냥 쨍한 아침이다. 조심조심 주차해 둔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양쪽 다리가 쑤시고 살갗은 쓰라린다. 컨디션이 영 아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허벅지는 피멍이 들고, 무릎과 종아리 여기저기도 멍 투성이다. 손등은 까맣게 탔고, 반지를 끼운 손가락 부부분만 빼고 손가락도 모조리 탔다. 꼴을 보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위쪽 지방의 대만만 생각했던지라 밑 지방의 대만은 그냥 동남아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 몇 시간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햇볕의 세기부터가 다르다. 선크림을 대충 발랐던걸 후회하지만 어쩌랴. 이미 타버린 피부인 것을.
그렇게 한 번 넘어지고 나니 전의를 상실했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숙소 체크아웃 시간에 딱 맞추어 숙소를 나섰다. 스쿠터 반납시간까지는 조금 남아서 스쿠터에 짐을 싣고 편의점으로 달렸다. 아침거리를 사서 근처 정자에 앉아 먹은 뒤 생각을 했다. 몇 시 배로 떠날까. 선택지는 두 가지. 12시 30분, 그리고 2시 30분. 그때의 시각 10시 50분. 아무래도 여기서 더 하고 싶은 게 없었다. 그래 12시 30분 배를 타고 육지로 일단 나가자. 뤼다오는 꼭 한번 와 볼만 한 곳이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번 가라면 갈래?라고 한다면, 음. 내 대답은 노. (이건 순전 개인적인 경험과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배를 타고 타이동 푸강 항구에 도착했다. 숙소도 아직 예약하지 않아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타이동 기차역 주변에 특가로 나온 숙소가 있길래 냉큼 예약했다. 평점 9.4. 이 정도면 믿을만하다. 버스를 타고 가려니 버스 도착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아 막막하던 차에 한 택시에서 합석해서 기차역까지 가겠냐고 물어오셨다. 가격은 100위안. 완전 콜이다. 짐을 싣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려 기차역에서 일단 허기를 달래기 위해 세븐일레븐에 갔다. 뤼다오에서는 없어서 마시지 못했던 옌마이나티에(오트라테)와 편의점 스파게티를 하나 샀다. 생각보다 훌륭한 스파게티 맛에 놀랐다. 오징어와 새우가 들어있는 살짝 매콤한 소스의 스파게티였는데, 대만에서 먹었던 것 중에 손에 꼽힐 정도로 맛있었다. 오트라테도 중간중간 마셔주었다. 그래. 이거지. 이게 육지의 맛이지. 잠시 황홀함에 젖었다. 먹은 자리를 정리하고 예약해 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차역에서 걸어서 8분 거리다. 조금만 힘내자.
숙소는 아주 쾌적했다. 공용 공간도 예뻤고 (좀 더웠지만) 방도 넓고 깨끗했다. 오늘은 여기서 요양을 좀 할 생각이다. 가격도 1066위안으로 합리적이었다. 뤼다오에서 그 방을 1박에 대략 800위안 정도 주고 썼으니 오늘 숙소는 완전 양반이다. 게다가 1인실. 사장님도 매우 친절하셨다. 현금으로 1066위안을 드리니 16위안은 돌려주신다. 1050위안에 해주시겠다는 뜻이다. 우와. 완전 셰셰, 라오반.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한숨을 돌리려는데 지금부터는 아무 계획이 없어 막막해졌다. 뤼다오에서 다음 일정을 생각하려 했는데 그냥 멘탈이 나가버려서 지금 잠시 렉에 걸린 상태다. 몸도 어느 정도 무리가 온 상태. 그냥 쉬려 하는데, 또 마음이 편치 않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좀 그렇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어쩔 수 있나. 다시 준비를 해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갈 채비를 했다.
타이동은 대중교통이 있긴 있지만 시간마다 1대씩 다니는 정도라 여행하기가 살짝 어려운 도시다. 타이동 기차역에서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타이동 버스터미널(시내)로 나갔다. 버스를 탄 시간은 20분 정도. 기다린 시간은 40분 정도 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그래도 자차가 없는 입장에서 불평할 수가 없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 내부는 살짝 사이키델릭 했다. 여기다가 우리나라 관광버스에서 틀 법한 노래까지 (우리나라로 치면 트로트 같은 느낌) 더하니 내가 타이동 시내에 나가는 건지 울릉도에 가는 것인지 살짝 헷갈릴 지경이다. 아무튼 신나는 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오늘 날씨가 흐려서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꼈다. 그래도 다행인 게 비는 오지 않았다.
날이 흐린 날은 차라리 저녁에 구경하는 게 더 예쁘다. 주변을 걸어 다니며 밤이 되길 기다렸다. 그런데 어제 신은 운동화가 흙탕물에 빠진 탓에 오늘은 슬리퍼를 신고 나왔는데 발등이 쓸린다. 이대로면 발이 아파 구경을 못할 것 같았다. 급하게 주변에 신발 가게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바로 건너편에 스포츠 브랜드 신발을 모아 판매하는 상점이 보여 들어갔다. 편한 슬리퍼를 하나 사서 신고 다니기 위함이었다. 이것저것 신어봤는데 나이키 슬리퍼가 제일 편해 구매하고 바로 신고 돌아다녔다. 그레. 이럴라고 돈 버는 거지 뭐. 평소 같았으면 쓰지 않았을 돈이겠지만 지금은 몸 편한 게 최고인 모드라 돈이 아깝지 않았다. 새로 산 슬리퍼는 길들일 필요도 없이 그냥 편했다. 발등은 더이상 쓸리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뤼다오에서도 느꼈지만 대만 아랫지방 사람들이 원주민의 영향인지 확실히 체구도 크고 피부도 더 까맣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다. 타이동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은, 남자들이 대부분 체대 스타일이다. 까맣고 크고 다부지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키가 다들 큰 느낌이다. 별로 크지도 않은 나라 안에서 아래와 윗 지방 사람들의 생김새가 확연히 다른게 신기했다. 그렇게 버스역 근처 구경을 마치고 타이동 야시장으로 걸어갔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배도 점점 고파졌다.
야시장에 도착해 무얼 먹을지 보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걸었다. 와중에 내 눈길을 끈 것은 전분가루를 푼 반죽에 야채를 넣고 부침개처럼 부친 음식. 맛이 궁금해 하나 시켜보았다. 먹어보니 안에 굴도 들어있다. 굴 전 같은 느낌이다. 맛있다.
저 위에 뿌려주는 소스는 살짝 마요네즈와 케첩을 섞은 맛이다. 가격은 70위안. 호불호 없이 좋아할 맛이다. 그리고 굴까지 들어있으니 (막 고른 것 치고) 가격대비 괜찮은 선택이었다. 입에 뭐가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져서 이것저것을 구경하다가 내일 아침으로 먹을 월남쌈 2개 들은 도시락 한 개 (60위안)와 구아바 썰은 것 (50위안)도 샀다.
확실히 소도시라 그런지 시내여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사람이 붐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더 좋았다.
야시장 구경을 마치고 버스를 타기 위해 돌아가는 길. 8시 차를 타고 돌아가려는데 시간이 좀 남았다. 주변에 쇼핑몰이 있어 한 바퀴 돌았다. 숙소 돌아가는 길에 탄 버스는 작은 마을버스였다. 안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트로트 거나 클래식이거나. 중간이 없는 타이동. 쉽지 않다. 근데 재밌다. 되게 매력 있다. 여행하기 쉽지 않은 곳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타이동 기차역에 내려 숙소까지 걷는데 오는 길이 정말 조용하다. 완전 주택가에 차도 별로 없고 걸어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필리핀에 내가 좋아하는 지역이 있는데, 수빅이라는 곳이다. 딱 그 분위기가 났다. 한적한 도로, 개인 주택들, 풀 내음. 숙소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괜히 숙소 주변을 빙빙 돌았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괜히 과거의 추억이 떠올라 기분 좋게 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갔다.
내일 일정은 아직 미정이다. 근데, 타이동. 되게 매력 있다. 조금 더 있고 싶어질 만큼.